[토론문] 청년의 의제가 ‘노동시장 밖 노동’이 될 때 생기는 질문들

2022 한국 기본소득 포럼 세션1. 청년, 공유지를 꿈꾸다에 제출한 토론문입니다. 발제문과 다른 토론문들은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포럼 안내 페이지 자료집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한인정 연구자의 “생존을 넘어, 모두의 실존을 향한 노동:청년생태활동가들의 일 경험과 의미 연구”는 독특한 소수의 개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연구다. 이 연구는 ‘청년’의 ‘일’과 ‘노동’을 탐색하는 연구이지만, 그 노동이 ‘시장 밖’에 있는 노동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청년 노동’에 대한 연구들과는 궤를 조금 달리한다.

청년 정책과 일자리 문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청년”의 정의는 “신체적ㆍ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인데, IMF 체제 이후 한창 무르익은 시기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하여 과실을 맺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부터 ‘청년 문제’가 시작되었고, 그에 기반하여 청년 정책과 청년 기본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실 ‘청년 문제’는 청년의 문제라기보다는 금융화로 예측 불가능해 진 글로벌 시장의 리스크를 노동 시장의 수요자들이 고스란히 공급자들에게 전이하면서 고숙련 정규직 일자리는 줄어들고 저숙련 불안정 일자리가 늘어난 문제, 시장의 문제라고 봐야한다. 그 과정에서 삶이 고단해진 것이 비단 청년 세대만은 아니지만, 이것이 청년 세대의 문제로 논의되어 온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청년”마ㅋ저 일자리”가 없는 것이 산업화 이후 자리잡은 사회 통념에 반하는 현상이기도 하고, 조직화 된 ‘청년 당사자’ 운동이 등장하면서 사회적 발언권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 결실로 2018년 도입된 청년 기본법은 청년을 만 19세 이상에서 만 34세 이하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성취가 이루어지는 동안 청년 당사자 운동에서 결국 해소되지 못한 문제는 ‘청년’이 단일한 존재가 아니고, 같은 처지에 놓여있지 않으므로 하나의 이해관계자로 ‘대의’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으며 건전한 민주시민으로서의 책무를 다할 수 있도록”(청년기본법 제2조) 하려면 고정적이지 않고, 단일하지 않고, 기성세대의 대상화 된 프레임에 갇히기 쉬운 청년 세대의 시민들에게 더 많은 마이크를 쥐어주고, 그들이 청년 세대 내에서 연결될 기회를 다층적으로 제공하는 노력이 필요할테다.

이 연구는 ‘생태적 노동’이라는 키워드로 청년의 목소리를 듣는다. 대도시와 산업단지 중심의 노동 시장을 떠나 자기 삶을 만들어나가는 청년들은 어떻게 노동하고 있으며,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을까? 발제문은 덜 하고,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수행하며 공생할 수 있는 다양한 관계를 주도적으로 조직화하는 생태적 노동을 통해 생태적 삶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맥락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연구자가 만난 청년 생태활동가들은 노동시장에서 경쟁하며 획득한 일자리에서 부정적인 경험을 하고 구조적인 한계를 인지함으로써 주체적 관점을 가지고 다른 삶으로 전환을 시도한다.(1. 1) 기존 노동에 대한 평가) 생태적 노동은 도시의 임금노동과는 다른 방식으로 분주하다. 내 생활의 몫을 자급하고, 자연에 인위적인 무리를 가하지 않고 제철에 맞추어 살아가려면 부지런히 무언가를 만들고, 기르고, 채집하고, 돌보아야 한다. 나 자신 또한 그 자연의 일부이므로 휴식을 취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즐겁게 지낸다. 연결된 모든 것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 흐름 안에서 ‘노동’과 ‘삶’은 ‘워라밸’로 분리되거나, 한 쪽이 다른 쪽을 희생시키지 않고 통합적으로 굴러간다.(1. 3) 생태적 노동의 탄생, 2. 생태적 삶의 탄생) 직장인들 간의 대화에서 흔히 이야기 되는 ‘노동자인 나’와 ‘진짜 나’ 정체성의 분리가 없다. 동시에 전문화 된 하나의 ‘일’만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들은 행사를 기획하고, 교육을 운영하고, 단체에서 활동하거나, 농사도 짓고, 함께 공부를 하기도 한다. 스스로 온전하다고 느끼는 일이지만 외부에서는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보기도 한다. (3. 1) 불인정노동)

이 청년들이 보고 있는 세상은 착취의 악순환으로 생태적 환경을 재생산하지 못하고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는 세상이다. 이 인식에서 출발하면 가치는 경쟁과 차별화, 시장점유율, 거래와 교환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잘 지키는 것, 절제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새로운 인식에 기반하여 자기 삶을 자립해내고자 하는 청년은 곧 환경을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이들은 매일매일 조금씩, 자급자족을 위한 것을 생산하면서 새로운 규범과 질서를 만들어 나간다. 지속가능한 일과 삶, 환경을 지향하는 이들의 노동이 정말로 계속되려면 결국 이 질서가 이들의 삶 바깥까지, 지역사회와 시장, 법과 정책에 자리잡아야 한다.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높은 임금, 더 좋은 복지 같은 임금노동 시장의 조건이 아니라 기만적이지 않고, 착취적이지 않은, 노동의 성과에 나를 끼워맞추지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이다. 이것은 창업 지원 정책이나 구직 지원 정책의 틀 안에서 해소될 수 없는 욕구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어떤 특정한 성과를 겨냥한 지원이 아니라, 지배적인 질서에 이끌려가지 않고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버티기 위한 힘, 권한, 협상력 그 자체다.

‘청년’은 계속 ‘변화’하는 주체다. 10년 전의 ‘청년’과 오늘의 ‘청년’은 단일하지 않다. 그러나 의사결정자들은 대체로 2,30년 전에 ‘청년’이었던 사람들이다. 잘 정리된 문제의식은 아니지만 발표문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의 청년들이 노동시장을 통해 사회에 진입하면서 맞닥뜨렸던 가장 큰 문제가 기회의 수가 절대적으로 너무 부족한 것이었다면, 현재의 청년들이 사회에 진입하며 맞이하는 문제는 대도시에는 비집고 들어갈 자기 삶의 틈이 없고, 농촌 지역에는 표준화 된 자원이 없어 모든 걸 너무나 “운”과 “제도”에 기대어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 아닐까? (3. 생태적 삶의 불안정성 3)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 4) 사적안전망에 기대어) 이는 결국 노동 시장의 문제가 청년 문제로 표현되었던 것 처럼, 기후위기와 저성장 시대 생태 사회로의 전환의 로드맵이 부재한 우리 사회 전체의 역량 문제가 청년 삶의 위기와 도전으로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번아웃’, ‘조용한 퇴사’와 같은 단어들, 그리고 지속적인 일터에서의 재난 사고들이 보여주듯이 오늘의 청년 세대는 노동 환경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을 갖고 있다. 대안적 일과 삶을 시도하고 추구하는 경향은 앞으로도 확산되어 나가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위기’를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하는 ‘시장’보다 더 지배적인 위치에 있을 수 있을까? 생태적 삶의 공간이 대도시에 종속된 또 하나의 여가 시장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어떤 자기조직화가 일어나야 할 지 질문해보게 된다.

[발제]기후위기에 맞서는 정치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

비례민주주의연대의 [ ]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 공개간담회의 발제문입니다. 왜 어떤 문제는 끝내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지, 모두가 첫 번째로 중요하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대다수가 세 번째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가 정치에 반영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정리해보았어요.

9월 21일 토요일 한국에서도 시민들의 기후위기 비상행동이 진행됩니다. 내가,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하는 일들이 속속들이 준비되고 있으니 함께해요. (2019.9.6 덧붙임)


어떤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생존과 연결된 문제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문제를 알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자 노력해왔다. 과학적 절차를 걸쳐 문제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졌고, 문제해결을 위한 신뢰할 수 있는 실행목표도 도출되었다. 그러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실행을 하면 된다. 그런데 어쩐지 수십 년 째 도통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문제의 초점을 문제 해결의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 정치 자체에, 키를 쥔 채로 움직이지 않는 이들에게, 그들에게 계속 키가 쥐어지는 상황에 맞춰봐야 하지 않을까. 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이야기다.

상식이 된 문제, 기후변화

기후변화는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있는 보편적인 상식이 되었다. 지구온난화는 학교 교과서에 실리는 주제고,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는 수치들은 나날이 더 어두운 방향으로 업데이트 되고있다. 최근 전문가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속도가 당초의 모델로 예측했던 것 보다 두 배가량 빨라질 수 있다는 어두운 전망을 발표했다. 지구온난화와 짝을 이루어 진행 되는 해양산성화 또한 산호초를 비롯한 석회생물들의 생존을 위협하며 바닷 속 생태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해양산성도는 26%가 증가했고, 이는 산업혁명 이전 5,500만 년 동안보다 10배 빠른 속도이다.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목도하고 있을 수 없는 위험들이 70년대 이후부터 수십년 째 이야기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로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이에 대응하는 사회의 변화는 명징하지 않다.

기후변화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일반 교양상식이 되어가는 사이 실제 우리의 일상도 기후변화에 위협당하기 시작했다. 이제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문제적 상황을 호소하기 위해 조그만 얼음조각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북극곰의 사진이나, 바닷 속 회잿빛으로 변해버린 산호초 군락까지 떠올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유럽에서는 올해 기록적인 폭염이 연일 갱신되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져 온다. 프랑스는 45도, 인접한 서유럽 국가들도 40도를 상회하는 날씨가 이어지는 중이다. 미국은 수년 째 허리케인과 캘리포니아 대형 화재 등 기후재난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에 가장 먼저 노출되고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인프라가 약한 가난한 지역에 거주하거나 야외에서의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유엔 인권이사회에서는 기후변화가 부유한 사람들은 문제를 회피할 수 있지만 나머지 가난한 사람들이 위기를 감당하게 되는 ‘기후 차별’ 시나리오로 현실화 될 수 있다며 대응을 촉구하기도 했다.

정도와 양상은 다르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일상의 변화는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대기 정체로 인해 누적된 고농도 미세먼지는 일상이 되었고, 뉴스에서 말하는 장마는 어쩐지 아열대 기후에서 볼 수 있다는 ‘스콜’과 더 유사해진 것 같다. 지난 해 여름에는 온 국민이 기록적인 폭염을 경험했다. 당장 이 글을 쓰고있는 지금도 “긴급재난문자”가 핸드폰을 울린다. “서울,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남 지역 폭염경보, 야외활동 자제, 충분한 물마시기 등 건강 유의 바랍니다.”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면 실내는 안전한가. 글이야 에어컨이 설치된 공간에서 쓸 수 있지만, 에어컨이 없는 곳에 사는 사람, 야외에서 일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최근 발행되고 있는 한국일보의 기획연재 “한 여름의 연쇄살인, 폭염”에서는 국내 온열질환 피해사례를 적극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예상가능하지만 피해자들은 대체로 열악한 주거지역에 사는 노인, 야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질병관리본부의 피해현황 집계 및 감시시스템은 병원의 자체적인 신고에만 의존하고 있어 피해상황을 축소 인지되는 것일 뿐, 기후변화는 이미 오늘의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사안이다.

온실가스배출 감축,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

기후변화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달성목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안에 온실가스배출을 넷제로(net-zero)에 도달하도록 줄이는 것이다. 넷제로란 기후에 미치는 영향이 0이 되는 수준까지 탄소배출을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 5월 1일 영국의회는 기후변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며 2050년까지 탄소배출 넷제로를 달성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계획은 6개월 이내로 제출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런 결단이 이뤄진 배경에는 “멸종저항”이라는 시민들의 급진적인 직접행동이 있다. 또 한편으로 영국은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에너지 전환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온 나라이기도 하다. 2025년 영국의 모든 석탄화력발전소는 문을 닫을 예정이다. 자동차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 중 하나인 독일은 2030년부터 화석연료에 기반한 자동차의 생산 판매를 금지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바라보면 상당히 급진적으로 보이는 이런 결정들이 진행되고 있는 건 당연히 그럴만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 기후변화협약을 위한 근거가 되는 평가자료를 생산하는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는 지난 해 마련한 특별보고서에서 온난화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지구기온상승을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1.5도 이내로 제한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탄소배출량을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최소 45% 감축하고, 2050년까지 넷제로 배출을 달성해야 한다. 지난 보고서에서 2.0도였던 수치가 1.5도로 조정된 까닭은 0.5도 차이로 최악의 사태를 상당부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99%의 산호가 소멸되는 것을 70~90% 소멸로 완화할 수 있고, 영구동토층이 녹아 발생하게 되는 메탄가스를 방지할 수 있다. 만약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특정 온도 이상으로 넘어가면 인간이 배출하는 온실가스와 별개로 지구가 스스로 온실가스배출을 가속화하는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정말로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IPCC 보고서는 가장 확실한 과학적 근거들만을 담은 보수적인 결과물로 이는 과장이 아니다.

한국은 93년 기후변화 협약에 가입했지만, 기후변화대응에 있어서는 연일 낙제점을 받고 있다. 2019년 국가별기후변화대응지수에서는 60개국 중 57위에 머물렀고, 2016년에는 기후변화 대응에 게으른 국가들에게 부여되는 ‘기후 악당’ 국가로 선정된 전례도 있다.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전세계적인 에너지원 생산추이를 보면 70년대 이후 일정한 흐름을 보이다가 석탄 에너지, 원자력 에너지가 점차 줄어들고 천연가스와 재생에너지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도 그렇게 하면 된다. 한국은 온실가스배출량 중 에너지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80%를 넘는 수준이기 때문에 에너지 전환이 온실가스배출 감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 “2030 국가 온실가스감축 기본로드맵”을 수정 발표하는 과정에서는 항목만 변경되었을 뿐 이전 안에 비해서 배출량이 실질적으로 줄어들지 않았고, 실질적으로 감축해야 할 산업분야 에너지 분야의 로드맵은 회피한 채 산림흡수를 주요 방안으로 제출했다. 올해 발표한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안”에서도 뾰족한 목표는 드러나지 않았다. 에너지 소비량을 줄이겠다고 했으나 비중이 가장 높은 산업 부문 에너지는 건드리지 않았고,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도 2040년 30~35%라는 보수적인 목표에 그쳤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다.

복잡하고, 불확실하고, 장기적인 문제를 풀어나가는 정치

올 여름을 앞두고 정부는 전기요금 인하를 폭염 대책으로 제시했다. 더우니까, 에어컨을 좀 더 킬 수 있게 하자. 아주 단순한 문제인식과 해결책이다. 그리고 이 해결책은 결과적으로 기후위기를 심화시킨다. 에너지 전환은 결국 전기세 인상을 통한 전력수요관리를 통해 이뤄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기후위기 국면에서 완전히 역행하는 관점을 보여준 셈이다. 미세먼지 추경예산에서도 (온실가스배출과 중복되는) 미세먼지 배출원을 규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정책 대신 마스크, 공기청정기 보급과 개인들이 운행하는 노후경유차 조기 폐차 지원 등 단기적인 안들을 주로 담았다.

이대로는 가까운 미래에 큰 위기에 처할 게 뻔한데, 왜 근본적인 예방과 변화를 피하고 해법 아닌 단순한 해법에만 머무르는 것일까? 표심을 해치기 싫은 마음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기후위기에 맞서는 정치는 시민의 안전과 생존을 보장하는 강력한 규제정치를 동반해야만 한다. 그런데 산업경제와 에너지를 둘러싼 이해관계는 명확한 반면 시민의 안전과 생존은 손상을 입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사회적 약자인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공론장에 잘 반영되기 어렵다. 결국 모두를 위한 규제정책은 아무에게도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기득권에게 더 유리하게 세팅되어 있는 한국 선거법 상, 주류 보수정당들에게는 규제정책으로 괜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 보다는 단기적인 생색내기용 처방이 ‘정치적’으로 더 안전한 선택이다. 물론 이런 논리는 이 상황을 전혀 합리화하지 못한다.

한편, 지난 7월 22일 보도된 세계일보의 기후변화 인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기후변화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의견이 85.2%로 나타났다.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보편적 공감대가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실업, 경제성장 등 다른 과제들과 함께 1년 안에 해결해야 할 과제의 우선순위를 묻자 경제성장이 1위를 차지하고 기후변화는 최하위에 놓였다. 응답자들은 10년 안에 해결할 과제를 물을 때에야 기후변화가 경제성장, 저출산 고령화에 이어 세 번째로 중요한 의제라고 답했다. 기후변화는 여전히 ‘미래의제’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2020년을 앞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는 이런 ‘선호도’를 승패의 전략에 반영하는 포퓰리즘 정치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눈 앞의 생존논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대한 85%의 인식이 없는 것으로 치부되지 않고 득표로, 당선으로 이어지게끔 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강화하는 것이 그 방향이 될 수 있다. 작금의 선거제도는 지역구 투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후보로 등장한 인물 개인과 조직화 된 이익집단 중심의 이해관계가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런 제도 하에서는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제가 특정 이해관계자 그룹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슈에 비해 오히려 표를 얻지 못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정책과 가치는 선거에 도움이 안된다는 판단 하에 계속 뒷전으로 밀려나기 십상이고, 유권자들은 정책과 가치에 투표를 하고 싶어도 사표심리 때문에 주저하게 된다.기후위기와 같은 아젠다를 다루기 위한 공공성의 정치가 가능하려면 승자 독식이 아니라 다당제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높은 비례성의 선거제도 도입이 필요하다. 적어도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준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비례대표제는 정치 권력의 다양성을 강화하는 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후변화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변수를 다수 포함한 문제다.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다루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필수적인 역량이다. 이를 테면 기후변화에 진지하게 대응하는 과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만나게 된다. 인구수는 늘어가는데 식생의 변화로 농업이 위기가 처하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탄소기반의 에너지 다소비 산업구조를 어떻게 전환할 것인지. 산업구조의 전환 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어떻게 적대적인 국가들이 힘을 합쳐 2050 온실가스배출 넷제로 달성이라는 목표에 함께 도달할 수 있을지. 양당제 정치 체제 하에서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사회적 토론을 입체적으로 해나가기 어렵다.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사회적 토론을 축적시켜 나갈 수 있는 정치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청소년의 투표권이 보장되고 청년 정치인들의 정치 진입 장벽이 낮아져야 한다. 과거의 해법만으로 풀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는 산업화 이후 인류가 화석연료에 기반한 경제구조와 생활양식을 발전시켜 오면서 생겨난 문제이다. 우리가 성취로 여겨온 것들이 빚으로 돌아온 셈이다. 경로의존성에서 벗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기후위기 활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정확히 그런 관점으로 질문을 던져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16세인 그는 기후변화를 가르치면서 변화를 위해 실천하지는 않는 성인들을 향해 미래가 없다면 왜 학교에 가야하는 지를 반문하며, 매 주 금요일 학교에 가는 대신 국회 앞에서 기후위기 대응 행동을 촉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라는 이름의 이 사회운동은 이제 전 세계 청소년들의 직접행동으로 확장됐다. 장기적인 문제를 풀고 싶다면 미래세대를 현재의 주권자로 대우해야 한다. 지금 그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되어야 미래를 바꿀 수 있다.

2020 총선을 기후위기 해결 선거로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고요한 것입니까? ‘개인의 작은 실천’만 습관처럼 되뇌일 뿐, 기후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회구조 개혁에는 왜 나서지 않습니까? 정부와 국회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녹색당 기후위기 비상사태 선언문)

지난 7월 29일 원외정당인 녹색당은 기후위기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정부와 국회의 침묵이 이 사회의 침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소리로 정치를 바꿔낼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IPCC 1.5도 특별보고서가 감축목표를 제시한 2030년이 10년 남았다. 기후위기를 염려하는 시민들의 의지가 의석으로 연결될 수 있는 선거법 하에서 내년 총선을 치르지 않으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타이밍을 놓치게 될 지도 모른다. 선거법이 극적으로 패스트트랙에 상정 되었지만 국회 정개특위를 둘러 싼 뉴스를 보면 갈 길은 쉽지 않아보인다. 누군가에게는 선거제도 개혁이 각 정당들의 이권다툼을 둘러싼 문제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기후위기에 맞서는 정치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선거제도 개혁은 미래를 지켜내기 위한 문제다. 2020 총선을 기후위기 해결의 시발점으로 기억하게 될 미래 없이는 다른 미래도 없다. 선거제도 개혁의 키를 쥐고 있는 여·야당은 늦지 않게 선거개혁을 성사해야만 한다.

[에세이] 쉼과 일, 제자리에 돌려놓기

“되게 바보 같은데, 사랑받는 기분이다? 클라이언트들한테 좋은 반응을 얻거나 무서운 윗사람한테 칭찬을 들으면, 프로답지 않게 갑자기 눈물이 글썽 고여. 나는 사랑도 꽤 받고 컸는데 왜 하필 그런 순간들에서 충족감을 느낄까? 미쳤나봐. 고장났나봐.”

정세랑 <보늬> (단편집, <옥상에서 만나요> 중)

“언니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정세랑 작가의 단편소설 <보늬>는 과로사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주인공 보윤은 인터넷에서 언니처럼 야근하다 돌연사한 사람들의 사례를 모으던 중, 생전의 언니가 했던 말을 떠올립니다. 위의 인용구는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하냐는 보윤의 질문에 대한 언니의 대답입니다. 보윤은 그런 충족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말하지만, 저는 솔직히 그 고장난 것 같은 마음이 무언지 알 것도 같았어요. 어려운 도전에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 두려움의 대상으로부터 인정받았을 때 드는 안도감, 동료에 대한 미안함이나 고마움 같은 감정들.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감정들로 만들어지는 마음의 상태가요. 

“일을 그냥 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비단 마음의 문제일까요? 실제로 일은 언제나 일 이상의 것입니다. 일은 나의 생계를 책임지는 생명줄이고, 성장의 과정이자, 소중한 관계이며, 때로는 나의 신분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특히 금융기관 앞에서 적나라해지더군요.) 이런 식으로 일이 삶의 대부분을 치환해나가다 보면 일을 제외한 삶의 다른 부분이 ‘나머지’인 것 같은 착시마저 듭니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정책도 한 몫 한 것 같아요. 한국의 사회보험 정책이나 주거 정책, 금융지원정책을 들여다보면 세상에는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만 있고 그 외의 구성원들은 ‘나머지’인 것만 같거든요. 온 사회가 착시에 빠져있다면, 내가 제대로 보고있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어요. 

소설에서 보윤은 언니와 같이 일로 충족감을 주고받는 사람들만 있어도 세상은 유지될 것이고, “나 같은 사람은 부품으로 치면 핵심부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보윤이듯, 세상은 나머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만 지난 세기를 이끌어 온 핵심논리가 나머지를 계약의 중심에 두지 않았을 뿐이죠. 지난 뉴스레터에 이어 다시 한 번, 우리에게는 새로운 계약이 필요합니다. ‘나머지’라는 공간을 애시당초 만들지 않는 형식의 계약이요. 

이런 맥락에서 요즘 정책위원회가 고민하고 있는 키워드는 ‘쉼’입니다. 쉼은 학습이고, 돌봄이자,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관계이며, 회복의 시간입니다. 배움과 회복, 돌봄 없이 일하고 성장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점에서, 쉼이야말로 모두에게 핵심적인 부분이고 그냥 쉼이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쉼은 남는 시간, 노는 시간으로 퉁쳐지지요. 소설가 어슐러 르 귄이 말년에 쓴 블로그 포스트들을 엮은 책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는 이런 모순에 대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르 귄은 고령의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한 하버드 대학교의 설문조사에 답변하던 중 이해할 수 없는 항목을 발견합니다. 여가시간에 무슨 일을 하는지 묻는 질문에 골프, 쇼핑 등등에 이어 창의적 활동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죠. 평생 작가로 살아 온 그는 자신의 ‘일’이 ‘여가’로 취급당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다가 이내 여가 시간이라는 구분에 대해 의문을 품습니다. 

“나는 아직도 남는 시간이 뭔지 잘 모르겠다. 내 시간은 전부 할 일로 바쁘기 때문이다. 항상 그래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시간은 삶에 점령되어 있다.”

어슐러 르 귄,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같은 글에서 르 귄은 오늘날 십대들이 여가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부디 그들에게 틈이 있어 자신의 내면 깊이 빠져들어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어쩐지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미래가 없는데 왜 학교에 가야하는 지 묻는 전세계의 청소년 기후위기 활동가들이 떠올랐어요.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좌절감 이전에 꿈을 꿀 수 조차 없는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들. 기후위기 시대, 책임있는 정치집단이라면 지난 세기의 청사진을 꿈으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 미래세대가 내용을 채워넣을 수 있는 꿈의 공간을 확보해주는 정치를 해야할 것입니다.

그건 틀림없이 지금까지 핵심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던 가치들과 대립하는 듯 보이는 규제의 정치일 수 밖에 없겠죠. 선거국면에서 녹색당이 제시해야 할 새로운 사회계약의 미션은 일과 경제성장, 삶의 질 사이의 끈끈한 연결고리를 끊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규제의 논리가 개인들의 삶에 있어서는 안전을 보장하고 자유를 확보하는 일과 한 쌍이라는 비전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기가 녹색당의 기본소득이 재위치화 될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말이네요. 모두 바쁘고 충만한 쉼의 시간 보내시기를 바라며, 
긴 편지를 읽으며 떠오르신 생각들이 있다면 아래 버튼을 눌러 정책위원회에게 전해주세요. 🌱

고맙습니다.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백희원 드림. 


7월 부터 녹색당에서 정책 뉴스레터 발행을 시작했어요. 두 번째 뉴스레터의 글을 작성했습니다. 격주 금요일에 발행되는 레터에는 녹색당 정책위원회의 현재진행형 고민과 자문위원 및 위원들의 뉴스 큐레이션이 함께 나갑니다. 구독하기 뉴스레터보기

[에세이]BIYN의 브랜딩이 내게 알려준 것

조만간 성북동으로 운좋게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폴레옹 제과점에서 성북 초등학교 방향으로 걸어올라가는 넓은 대로는 정말 멋지다. 인도가 없어서 뒤에서 엔진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바짝 벽에 붙는 동네에 살다보니 근래에 성북동에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인도였다.

그 길을 처음 제대로 걸어본 날은 디자인 스튜디오 오늘의 풍경 인아씨와 BIYN(구 ‘기청넷’)의 브랜딩을 위한 킥오프 미팅(겸 나들이)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초여름이었는지 늦여름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여간 여름의 어느 날, 인아씨와 커피 맛이 끝내주는 카페에 앉아 나는 기청넷의 새 아이덴티티에 무엇을 담고 싶은지 한참을 늘어놨다. 인아씨가 열심히 알겠다는 표정으로 내 말을 들어준 덕분에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겠는 순간까지 말을 많이 했다. 할 말 없이 말했다는 게 아니라 생각 이상의 말을 했다는 의미다.

“게으름뱅이를 위한 기본소득 같은 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스위스 기본소득 운동에서는 동전을 시각적으로 이용했는데, 우리도 현금이라는 상징을 그냥 당당하게 들이밀어도 좋겠구요. 힙스터들한테 잘 팔리고 싶다!!!” 기억나는 건 그닥 안 중요한 말 뿐이다. 우리가 굿즈를 만들자 쿵짝쿵짝 하며 동전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동전이 생각보다 꽤 값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회의를 마치고 빵을 먹으러 갔다. 빵을 먹고, 길상사에 갔는데 반바지를 입고 그냥 가면 안된다며 다리를 가릴 수 있는 보자기 치마 같은 것을 입구에서 나눠주고 있었다. 알고보니 그 날 높은 스님이 온다나. 절의 맞은 편 가게 벽면에서 효재님이 보살처럼 웃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남은 여름 동안도, 다가 온 가을에도 모두모두 너무 바빴고 겨울에야 간신히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기청넷의 개발자인 주연씨도 함께 참여하자 팀 다운 느낌이 났다. 셋이 모인 첫 워크숍 날, 인아씨가 준비해 온 BIYN의 아이덴티티를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깔끔한데 볼드하고 귀엽다는 것이었다. 다른 것보다 청년의 스테레오 타입처럼 톡톡 튀거나 발칙하지 않아서 좋았다. Y가 그냥 그 모양답게 톡 튀어나와있을 뿐. 그래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색이 들어갔으면 싶어 인아씨에게 검은색 말고도 옵션을 달라고 요청했다. BIYN의 디자이너는 똑 부러지게 고개를 저었다.

색이 필요하면 로고가 사용될 때 배경색을 바꿔. 로고는 무조건 검정이야. 색이 들어가면 너무 귀여워 보인단 말이야. 대신 배경색을 바꾸면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색을 쓸 수 있고, 얼마나 좋아?”

나도 귀여운 척은 싫지만 그래도 색을 좀 지정해주세요. 통일된 색이 있는게 굿즈나 그런 거 만들기도 낫지 않아?”

아니야. 기본소득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잖아. 얘는 그렇게 쓸 수 있게 나와있어. 이렇게 그림을 뒤에 러프하고 귀엽게 덧붙이거나, 배경 색을 바꾸거나 하면서.”

인아씨가 만들어 온 몇 가지 예시를 보여주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여름에 했던 중요한 말들이 유추되었다. 인아씨가 다 기억을 한 것인지 흡수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기본소득이 관점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특정한 문제에 대한 답처럼 소개하는 사람들이 자기 답으로 다른 답의 가능성을 지우는 것 같고, 그 보다는 현재의 여러가지 문제를 반영할 수 있는 관점으로서의 기본소득 운동이 발전되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이 의제가 보편적인 삶의 문제이자 사회 전환의 문제로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면 좋겠고, 누구나 자기 문제를 기본소득을 통해 해석할 수 있으면 좋겠고, 당연히 이곳의 기본소득 운동에서는 더 실질적인 문제를 가진 소수자의 목소리에 가중치가 실리면 좋겠고. 그런 말들을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내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납득하고 있는 동안 주연씨와 인아씨는 이미 새 웹사이트 와이어 프레임의 톤을 맞추고 있었다. “선이 4픽셀이라구요?” “네.” 너무 큰 텍스트와 너무 두꺼운 선들이 모여있으니 조금 흥이 나고 어이없게도 보기가 좋았다. “이게 브랜딩이야. 히워나.” 그래그래 알겠어. 그걸 보니까 큰 거리에서 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되어 누구나 그렇게 함께 말할 수 있는 그런 운동을 하면 되겠다. 그리고 이걸 띄우고 나면 비로소 나는 일단 딱 하나의 큰 목소리가 되어볼 수 있겠네. 누군가를 대표하느라 바짝 긴장한 느낌을 감추기 위해 길고 긴 실 같은 걸로 몸을 한참 감싼 주장이 아니라. (끝)


p.s.- 깨달음을 주는 사람. 이것 너무 한국의 중년 남성 지식인들의 판타지적 상황인 것 같은데, 역시 홍두깨(잡지 쿨 3호 참조)의 전적을 가진 인아씨다.

[에세이] 집을 방에 꾹꾹 눌러담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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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원아, 우리 ‘티 타임’ 할까?” 어린시절 우리 엄마는 가끔 작은 금색 방울같이 반짝이는 말을 해서 나의 평범한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티 타임이라지만 사실 불을 다 끄고 노란 백열등만 키는 걸 빼면 늘 밥 먹는 식탁에서 늘 쓰는 머그컵에 늘 마시는 과실차를 마시는 평범한 시간이었고 찻잔이나 티 푸드는 없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그런 건 몰랐기 때문에 어린 나는 우리의 근사한 티 타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전등갓 그림자 속의 둥글고 노란 빛 아래, 의자에서 허공에 다리를 흔들며 내 몫의 따끈한 유자차를 마시던 해질 녘 시간은 지금도 떠올리면 편안해지는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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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복도식 아파트에 이십 년 남짓 더 사는 동안 부엌의 노란 등은 어느 틈인지도 모르게 밝은 형광등으로 바뀌었고, 또 몇 년 전부터는 나도 독립해 친구와 함께 살게 되었다. 부모님의 집보다 훨씬 작은 방 한 칸이었지만 처음 살기 시작했을 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물론 처음엔 어디까지나 임시거처로 생각했다. 계약서에도 2년 뒤 재개발이 시작되면 나가야한다고 적혀있었다. 보증금이 그 정도 불안은 수용할 만큼 쌌다.

결과적으로 지지부진한 재개발과 너그러운 주인집과 나의 ‘스튜핏’한 경제생활 덕에 나는 이 평방 2.5미터의 방에서 남은 이십대를 다 보내고 지금도 살고 있다. 4년 간 짐(이라고 쓰고 책과 옷이라고 읽는다)과 일이 늘면서 내 작은 안식처는 먼지와 피로로 가득 찬 곳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전 여느 때처럼 ‘왕자행거’가 옷을 뱉고 있는 매트리스에 모로 누워있던 나는 조립식 책장이 조립식 책상 위로 책을 뱉고 있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 결심했다. ‘더는 안되겠어. 책상은 버리고 서랍장 달린 침대를 사야겠어.’

변덕이 죽끓은 결과 한 달 뒤 방에 들어온 건 서랍장 침대가 아닌 ‘벙커침대’였다. 1층이 없는 2층 침대인데, 아래에 책상이나 수납공간을 넣어 좁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쓴다고들 했다. 나는 그 공간에 1인용 소파와 작은 티 테이블을 두었다. 그리고 크고 가벼운 실용적인 티팟에 여러 꽃향기가 블렌딩된 루이보스 티를 우렸다. ‘가성비 갑’이라서 처음으로 할부를 긁어버린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틀고, 탁상용 스탠드를 키고, 오랜만에 아로마 디퓨저에 초를 켰다. 향기와 노란 led 불빛과 피아노 소리가 방의 표면을 한 겹 씩 덮어주자 바람이 새는 나무 창틀이 낭만적으로 보였다. 와이파이도 이 방을 픙성하게 채워줬음은 물론이다. 티팟 안 쪽에 수증기가 가득 맺힐 때 쯤 2층 침대에 누워보자며 올라가있던 하우스메이트가 농담을 던졌다. “와, 나 차 마시러 로비로 내려갈게.” “그래 5분 뒤까지 나와. 아니 복도에서 만날까? 사다리 중간에서.” 나는 더 호들갑을 떨었다.

***

철제 프레임 하나로 구조가 생기자 수면캡슐 겸 창고였던 내 방은 집에 대한 내 기억과 소망이 어렴풋이 벽에 반영된 무언가로 정리되었다. 행거가 있는 벽은 옷방, 책장이 있는 벽은 서재, 그리고 거실 위에 침실. 고작 이 정도로 어쩐지 마음에 여유가 생겨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차 한 잔과 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부모님의 집에서 물려받은 작은 행복에 대한 기억이 방의 삶을 견디게끔 하는 것 같다. 여기서도 티 타임은 되니까. 하지만 서울에서 이 정도로 만족해도 괜찮은 걸까? 이러다 찻잔만 든 채로 쥐도 새도 모르게 쫓겨나지 않으려나. 나는 이런 생활이 안타깝지도 않은 나 자신이 좀 염려되고 늘 그렇듯 내 걱정은 엄마가 대신한다. 지난 명절 오랜만에 내 방에 들른 엄마는 그래도 사람 꼴로 살려고 애쓴다고 진심으로 칭찬하며 그래도 이불은 꼭 햇볕에 말리라고 신신당부했다. “삼십분이라도. 알았지?” 알겠다고는 했는데 한낮에 베란다에서 바싹 말린 이불 위에서 뒹굴 때의 포근함까지는 아무래도 이 방에서 감당이 안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