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쉼과 일, 제자리에 돌려놓기

“되게 바보 같은데, 사랑받는 기분이다? 클라이언트들한테 좋은 반응을 얻거나 무서운 윗사람한테 칭찬을 들으면, 프로답지 않게 갑자기 눈물이 글썽 고여. 나는 사랑도 꽤 받고 컸는데 왜 하필 그런 순간들에서 충족감을 느낄까? 미쳤나봐. 고장났나봐.”

정세랑 <보늬> (단편집, <옥상에서 만나요> 중)

“언니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정세랑 작가의 단편소설 <보늬>는 과로사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주인공 보윤은 인터넷에서 언니처럼 야근하다 돌연사한 사람들의 사례를 모으던 중, 생전의 언니가 했던 말을 떠올립니다. 위의 인용구는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하냐는 보윤의 질문에 대한 언니의 대답입니다. 보윤은 그런 충족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말하지만, 저는 솔직히 그 고장난 것 같은 마음이 무언지 알 것도 같았어요. 어려운 도전에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 두려움의 대상으로부터 인정받았을 때 드는 안도감, 동료에 대한 미안함이나 고마움 같은 감정들.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감정들로 만들어지는 마음의 상태가요. 

“일을 그냥 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비단 마음의 문제일까요? 실제로 일은 언제나 일 이상의 것입니다. 일은 나의 생계를 책임지는 생명줄이고, 성장의 과정이자, 소중한 관계이며, 때로는 나의 신분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특히 금융기관 앞에서 적나라해지더군요.) 이런 식으로 일이 삶의 대부분을 치환해나가다 보면 일을 제외한 삶의 다른 부분이 ‘나머지’인 것 같은 착시마저 듭니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정책도 한 몫 한 것 같아요. 한국의 사회보험 정책이나 주거 정책, 금융지원정책을 들여다보면 세상에는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만 있고 그 외의 구성원들은 ‘나머지’인 것만 같거든요. 온 사회가 착시에 빠져있다면, 내가 제대로 보고있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어요. 

소설에서 보윤은 언니와 같이 일로 충족감을 주고받는 사람들만 있어도 세상은 유지될 것이고, “나 같은 사람은 부품으로 치면 핵심부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보윤이듯, 세상은 나머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만 지난 세기를 이끌어 온 핵심논리가 나머지를 계약의 중심에 두지 않았을 뿐이죠. 지난 뉴스레터에 이어 다시 한 번, 우리에게는 새로운 계약이 필요합니다. ‘나머지’라는 공간을 애시당초 만들지 않는 형식의 계약이요. 

이런 맥락에서 요즘 정책위원회가 고민하고 있는 키워드는 ‘쉼’입니다. 쉼은 학습이고, 돌봄이자,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관계이며, 회복의 시간입니다. 배움과 회복, 돌봄 없이 일하고 성장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점에서, 쉼이야말로 모두에게 핵심적인 부분이고 그냥 쉼이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쉼은 남는 시간, 노는 시간으로 퉁쳐지지요. 소설가 어슐러 르 귄이 말년에 쓴 블로그 포스트들을 엮은 책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는 이런 모순에 대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르 귄은 고령의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한 하버드 대학교의 설문조사에 답변하던 중 이해할 수 없는 항목을 발견합니다. 여가시간에 무슨 일을 하는지 묻는 질문에 골프, 쇼핑 등등에 이어 창의적 활동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죠. 평생 작가로 살아 온 그는 자신의 ‘일’이 ‘여가’로 취급당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다가 이내 여가 시간이라는 구분에 대해 의문을 품습니다. 

“나는 아직도 남는 시간이 뭔지 잘 모르겠다. 내 시간은 전부 할 일로 바쁘기 때문이다. 항상 그래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시간은 삶에 점령되어 있다.”

어슐러 르 귄,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같은 글에서 르 귄은 오늘날 십대들이 여가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부디 그들에게 틈이 있어 자신의 내면 깊이 빠져들어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어쩐지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미래가 없는데 왜 학교에 가야하는 지 묻는 전세계의 청소년 기후위기 활동가들이 떠올랐어요.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좌절감 이전에 꿈을 꿀 수 조차 없는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들. 기후위기 시대, 책임있는 정치집단이라면 지난 세기의 청사진을 꿈으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 미래세대가 내용을 채워넣을 수 있는 꿈의 공간을 확보해주는 정치를 해야할 것입니다.

그건 틀림없이 지금까지 핵심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던 가치들과 대립하는 듯 보이는 규제의 정치일 수 밖에 없겠죠. 선거국면에서 녹색당이 제시해야 할 새로운 사회계약의 미션은 일과 경제성장, 삶의 질 사이의 끈끈한 연결고리를 끊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규제의 논리가 개인들의 삶에 있어서는 안전을 보장하고 자유를 확보하는 일과 한 쌍이라는 비전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기가 녹색당의 기본소득이 재위치화 될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말이네요. 모두 바쁘고 충만한 쉼의 시간 보내시기를 바라며, 
긴 편지를 읽으며 떠오르신 생각들이 있다면 아래 버튼을 눌러 정책위원회에게 전해주세요. 🌱

고맙습니다.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백희원 드림. 


7월 부터 녹색당에서 정책 뉴스레터 발행을 시작했어요. 두 번째 뉴스레터의 글을 작성했습니다. 격주 금요일에 발행되는 레터에는 녹색당 정책위원회의 현재진행형 고민과 자문위원 및 위원들의 뉴스 큐레이션이 함께 나갑니다. 구독하기 뉴스레터보기

[에세이] 역사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때

: 로마(2018, 알폰소 쿠아론) @상상마당

모리님께.

일주일만에 첫 편지를 보냅니다.[1]

그날, 집에 돌아와 함께사는 친구에게 오늘 극장에서 되게 오랜만에 졸았다고 말했더니 가볍게 웃고나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근데 극장에서 자는 거 은근히 기분좋지 않아? 어렴풋한 빛에 깨잖아. 되게 기분좋게 일어나져.” 맞아 정말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아마도 “어렴풋한 빛”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것인지, 그 순간 마음 속에 그날 본 영화가 마치 선잠에 들어 꾼 꿈처럼 희미하게 떠오르더니 사라졌어요. 귓가엔 어린 시절 저녁께쯤 되면 들리던 두부 파는 아저씨의 종소리가 초여름의 날벌레 소리와 함께 웅웅 맴돌았고요. 그건 참 오랜만에 보는 내면의 풍경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영화라는 게 종종 심상을 남기기도 하는 거였지.’ 어떤 멋진 장면의 인상이나 줄거리나 인물이 기억에 새겨지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원래 있었던 느낌들을 일깨웠던 영화들을 모처럼 떠올렸어요. [2]


‘로마’는 롱테이크가 자주 나오는 흑백 영화였지만 명상적이기보다 너무나 구체적으로 감각을 자극하는 영화였던 것 같아요. 아니, 어쩌면 이건 정말로 명상적인 특징일지도 모르겠네요 감각에 집중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래서 잠이 솔솔 왔던걸까…(조조를 보기 전 날에는 일찍 자는 걸로.) 아무튼 우리가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잠시 이야기 나누었듯이 상징으로 가득한 영화였는데요. 너무 상징적인 작품들은 종종 관객을 조금 머쓱하게 하잖아요. 삶에 대한 무거운 의미부여가 호들갑스럽게 느껴진달까. 저는 그렇더라고요. 사실 그래서 감독의 전작인 ‘그래비티’를 보면서는 조금 힘들었거든요. 이야기의 배경으로서의 우주는 그 자체로 일종의 메타포가 되어버리기도 하니까. 로마에서 상징들이 지나가는 경험은 그와는 달랐습니다. 역사 속의 로마도, 이탈리아의 로마도 아닌, 멕시코의 로마를 배경으로, 상징들은 생활의 시공간 속에 촘촘히 스며들어 있었고, 아주 유려한 시청각적 경험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잘 재현된 보편은 개별적인 경험들을 소환합니다. 그래서였던 것 같아요. 그날 저녁,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6.25 전쟁 이야기를 물었던 적이 있는데, 대답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유 그때 정신 없었지, 뭐. 그런 느낌으로. 그저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네요. 카스테라를 좋아하고 매일 매일 노인대학에서 배운 가곡을 복도까지 들리도록 크게 불러서 엄마를 민망하게 했던 우리 집의 할머니가 일제시대도, 6.25 전쟁도, 유신정권도 지나온 사람이라는 것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도 그런 시대들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없었어요.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는 할머니의 것이었죠. 어렸을 때 공부를 더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돈 벌라고 안시켜줬다는 이야기 같은 것. 하지만 무의식중에 일본어 동요를 흥얼거리다가 짜증을 내는 건지 웃는 건지 헷갈리는 말투로 아이고 이건 까먹지도 않는다고 말할 때, 제게는 ‘역사’라고 할만한 것이 갑자기 할머니의 얼굴을 하고, 할머니의 목소리로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는 했습니다. 할머니가 나보다 어렸을 때 할머니는 쇼죠지의 너구리에 대한 동요를 불렀구나.

할머니에게 시대를 평가하는 역사적 관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듯,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할머니는 기억해야 할, 드러나는 존재는 아니었겠죠. 실제로 우리 할머니와 같은 사람들을 부르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어요. 이를테면 할머니는 ‘국제시장’의 등장인물도, ‘응답하라 시리즈’의 등장인물도 아니거든요. 시골에서 상경해 식모살이를 하거나 공장에 다니지도 않았고, 결혼해서 주부가 되지도 않았어요. 간호사로 보건소에서 일하면서 홀로 엄마를 낳아 모녀가정을 꾸리셨죠. 그 시대의 역사는 전문직 여성도, 비혼모도 바라보지 않았고요. 부끄럽게도 멕시코의 사정을 잘 모르지만, 로마의 주요 인물들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네모난 집은 역사적 스펙터클에서 비껴서 있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더욱 부각되는, 이 영화의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은 클레오가 우연히 페르민과 만나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 뒤 양수가 터지는 때였는데, 제게는 그 순간이 역사와 클레오가 서로를 알아보는 사건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재현의 예술로서 영화는 옛날 일에 대해서 이런 만남을 주선할 수 있네요. 감탄했지만 클레오의 상황은 너무 가혹했고, 우리들에겐 불행한 일을 겪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남성 감독을 의심할 권리가 충분히 있지 않은가요? 저는 곱씹었어요. 이 영화의 사랑을. 그건 차별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는 분명 아닌 것 같았습니다. 착취와 돌봄과 구분되지 않은 채로 인물들의 삶을 보호하는 무언가였어요. 긍정할 수 없지만 부인해서는 안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지난 사정.

여기까지 글을 적고 나니 어떤 보편적인 질문들이 제게 떠오릅니다 : 산다는 일에서 살아남는 일의 비중은 얼만큼일까요? 살아남는 일은 사랑하는 일을 얼마나 일그러뜨릴까요? 아니, 사랑은 어떤 일그러짐 속에서 가능한 것 일까요? 나는 (어쩌면 우리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꼭 근사하지만은 않은 사랑을 한 결과 지금 살아있는 것이구나. 이 발견에 대해 어떤 감정도 들지 않는데요, 다만 흑백의 하늘처럼 애매한 질문들이 한 동안 답 없이 떠다닐 것습니다. 상징은 심상으로 다가와서 결국 질문이 되었네요. 모리님께는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천천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19년 1월,

희원 드림.


[1] 이 글은 이모리님과 함께 월 1회 함께 영화를 보고 글을 쓰기로 해써 쓰여진 글이다. 회신은 백 편의 에세이에서 읽을 수 있다. 영화는 두 편을 보았고, 글은 꼭 한 번 오갔다. 가끔 모리님이 준 단풍모양 향을 피운다. 종이 향을 맡고 싶을 때.

[2] 페드로 코스타의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 아녜스 바르다의 ‘다게레오타입’. 테렌스 데이비스의 ‘먼 목소리, 조용한 삶’.

[에세이] 불완전한 엄마의 딸

엄마랑 같은 반이었다면 우린 정말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거라고 가끔 생각했다. 엄마랑 싸우거나 어쩐지 날카로운 분위기가 며칠 째 계속될 때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엄마는 좋은 사람이니까. 우리가 친구였다면 얼마나 속깊은 이야기들을 나눴을까. 자신의 가장 인간적인 부분을 나눌 수 있다는 데서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을거야. 나는 엄마가 연락하면 기쁘게 달려갔을 거야. 하지만 나는 가끔씩 엄마의 전화를 못본 척 안받는 딸.

나는 엄마에게 좋은 것만 받고 싶어하는 좀 이기적인 딸이었다. 엄마의 정의로움과 의연함, 눈치 빠른 실행력,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감각만 알고 싶었다. 머리가 크면서 보이는 엄마의 지나친 열정, 선을 넘는 호의, 다소 허영심처럼 보이는 낭만적인 기질을 나는 부끄러워했다. 나의 이런 마음은 아마 때때로 밖으로 새어나와서 엄마를 상처입혔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 상처는 엄마가 내게 준 것과도 닮았다. 이 이야기는 구구절절하지 말아야지. 짧게 요약하자면 나의 유별난 구석을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모든 면에서 평범하기를 기대했다는 이야기다.

유독 엄마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순간은 엄마가 내게 어떤 여성성을 강요하는 말을 할 때였다. ‘남자랑은 손도 잡는 게 아니야.’ ‘너 요즘 살 좀 찌는 것 같다.’ ‘너도 좀 여성스럽게 입고 다니면 안되니?’ 왜냐하면 내가 자라는 내내 엄마는 페미니스트였으니까. 여성 위인전집을 읽히고, 남성의 권위를 비웃으며 여성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때문에 나는 한동안 엄마를 무척 기만적인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내 멱을 잡은 채로 네가 자유롭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그 두 가지 모두가 하나의 사랑이었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이 간극을 이해시키기가 도무지 어려웠다. 엄마는 그저 애정에 대해 돌아오는 것이 왜 거부인지 의아해했던 것 같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나 역시 분열적인 욕망 속에 있었다. 엄마의 사랑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엄마에게 완전히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은.

어느 날 나는 나의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엄마의 그 모순을 이해했다. 아버지도 오빠도 없이 외할머니와 단 둘이 생활하며 2인 분의 몫을 하리라 생각한 자존심 세고 모험적인 여자아이와, 언제나 손 쉬운 침입의 대상으로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보수적으로 자신을 지키는 여자아이가 한 사람으로 자라났다는 것을. 엄마는 멋진 사람이지만 당연하게도 완벽한 엄마는 아니었다. 그리고 완벽한 페미니스트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딸인 나는 또 이런 문제들을 가진 불완전한 페미니스트이고, 나는 이 역사의 패턴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존경하는 아버지와 자랑스러운 아들의 역사가 아닌 사랑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엄마가 나를 완전히 인정해주는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늘 의심의 여지없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오늘도 온전히 불완전한 인간으로 나답게 살 수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주관한 ‘여성과 소수자가 나답게 살기 위한, 질문을 바꾸는 섹슈얼리티 집담회 페미니스트 5인의 가족 이야기 : 아빠 성은 떼어냈지만’에 참여한 후 집에 오는 길에 굴러나온 이야기.)

[에세이]취약성을 SNS에서 드러내기

친구들에게 나는 꽤 헤비한 SNS 유저로 보이는 모양이다. 스스로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 바로 이 점이 정말로 헤비 유저라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언가에 깊이 몰입할 수록 자극은 점차 줄어들고 당연해져서 스스로는 한 발만 담그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법이니까.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일년에 극장에서 영화를 백 편 가까이 보고도 자신이 시네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전력이 있다. “와 너 영화 되게 좋아하나보다.” ‘아니 뭐 되게까지는 아닌데…’ 친구들이 옳았다.

당연히 나는 페이스북과 트위터, 인스타그램을 모두 한다. 페이스북에는 내가 하는 일과 관련된 홍보를 주로 하고, 트위터에서는 사회를 대상으로 화나는 일들에 대한 비평이나 연속적으로 발전해가는 선언을 주로 하는 것 같다. 인스타그램은 bgm과 도토리만 없을 뿐 사실 상 나의 싸이월드 미니홈피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가상의 미니룸이 아니라 리얼 미니룸을 찍어올리고 있달까. 또한 세 개의 플랫폼은 모두 내 글의 발행 채널이기도 하다.

한 때 나는 이 세 개의 SNS 계정을 분화된 자아를 운용하는 데 사용했었다. 그건 마치 공 세 개로 저글링을 하는 일 같았다. 하나는 오른손에, 다른 하나는 왼손에, 그래서 언제나 공중에 또 하나의 공이. 플랫폼 간에 중첩되는 관계들은 없지는 않았지만 극히 적었다. 나는 페이스북에 회사 사람들이 봐도 안전한 글을, 트위터에 페미니스트들이 봐도 빻지 않은 내용을, 인스타그램에 지인들에게라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TMI들을 올렸다. 각각의 플랫폼에서 얻는 것이 또 서로를 지지해주는 상호작용을 이루고 있었다. 직장에 다니며 책임감 있게 돈을 벌고 사이드 프로젝트에 자아의 많은 부분을 의탁했던 당시의 생활이 반영된 운영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 나는 저글링을 하는 나를 팔짱을 끼고 바라보며 만족했다. ‘좋아. 좋은 리듬이야. 괜찮게 하고 있는 것 같아.’ 첫 직장에 들어간 지 얼마 안되었을 때였다. 안간힘을 쓰는 줄도 모르고 매일 최대 출력으로 일해보던 나날들.

*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시간이 일년 쯤 지나고 공들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내가 공을 던지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공 같았다. 핀볼 게임 속의 공. 이리 튕기고 저리 튕기며 정신없이 점수를 올리다가 구멍으로 쏙 낙하해버릴 운명이 뻔했다. 그때 지푸라기 잡듯이 일기를 써서 SNS에 올렸다. 왜 그것이 나의 지푸라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정을 담은 글들이 일과 관계의 부작용처럼 도르르 굴러나왔는데 약간은 보너스 같기도 했다. 통제력을 잃은 나는 마구잡이로 올렸다. 인스타에도, 페이스북에도, 트위터에도. 노골적인 ‘나 힘들어’일 때도 있었고 힘든 사람이 턱괴고 바라보는 풍경에 대한 묘사일 때도 있었는데, 아무튼 징징거림에 대한 부끄러움은 차치하고 그러고 나면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처음에는 감정의 토로였던 것이 점차 내게 있는 취약점들을 글로 풀어내는 일로 변화해갔다. 나는 나의 어린시절에 대해, 고질적인 우울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아빠의 병에 대해, 동생의 장애에 대해, 동성과의 연애 경험에 대해, 또 나의 가난과 작은 방에 대해, 동시에 내가 누린 특권들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었고, 신기하게도 그것은 나를 약자로 두고 호소하거나 변명하는 방식의 정확히 정반대를 수행했다. 점차 부끄러움도 해방감도 사라지면서 누가 어떻게 보든 이런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함 같은 것이 남았던 것이다.

분명 그 전에도 나는 스스로를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SNS 공간에 하나씩 드러내다보니 의외로 새롭게 인정하게 되는 지점들이 있었다. 나 자신에게만 솔직하면 될 일 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에 대해 안이한 태도로 일관해왔다는 것을 랜덤한 타인들 앞에서 솔직해지면서 느꼈다.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러주거나 리트윗을 해줬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타인의 인정을 어느정도 필요로 하는 평범한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자신에게 솔직하기’라는 내면의 사정은 의외로 어느정도 공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공과 사를 명확히 가르고 비밀을 가진 사람이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세계와의 상호성을 인지하고 자아의 실현과 더 나은 세계를 올바르게 정렬하는 것, 그로써 안팎으로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온전한 성숙의 지표임을 안다. 어린 시절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희안하게 돌아왔다.

그리하여 저글링을 하는 동안 서로의 영역에 숨겨야 했던 지점들은 이제 통합되어 보여지는 내가 되었다. 재미있게도 이 과정이 진행됨과 동시에 세 개 플랫폼에 중첩되는 관계들이 늘어났다. 나는 사이드 프로젝트의 행사에 직장 동료들을 초대하기도 하고 사이드 프로젝트를 함께하는 동료를 직장에 연결해주기도 한다. 이제 나는 친구들에게도, 동료들에게도, 언젠가 함께 일하게 될 수 있는 사람에게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보여질 수 있는 글을 쓰고 세 개의 플랫폼에 조금 더 명확한 톤으로 발행한다. 팔짱을 낀 나 같은 것은 없다. 글을 마치고 기분좋게 기지개를 켜는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끝)


p.s.- 이렇게 내 글은 거의 모두 나에 대한 것이다. 가끔 우리에 대한 것이 되기도 하지만, 언제나 내 곁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사실 이것이 타인에게도 의미있는 것인가 싶을 때가 많았다. 읽어달라는 것은 염치없는 일일까? 내뱉는 말과는 달리 이런 생각을 한켠에 늘 안고 있다. 그래서 이 레터를 쓰는 동안 어떤 글이든 자유롭게 써보며 낯을 떠올릴 수 있는, 모두 내가 정말 좋아하는 필자인 독자들이 있다는 호사를 마음껏 누려볼 심산이다. 고맙습니다.

[에세이]BIYN의 브랜딩이 내게 알려준 것

조만간 성북동으로 운좋게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폴레옹 제과점에서 성북 초등학교 방향으로 걸어올라가는 넓은 대로는 정말 멋지다. 인도가 없어서 뒤에서 엔진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바짝 벽에 붙는 동네에 살다보니 근래에 성북동에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인도였다.

그 길을 처음 제대로 걸어본 날은 디자인 스튜디오 오늘의 풍경 인아씨와 BIYN(구 ‘기청넷’)의 브랜딩을 위한 킥오프 미팅(겸 나들이)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초여름이었는지 늦여름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여간 여름의 어느 날, 인아씨와 커피 맛이 끝내주는 카페에 앉아 나는 기청넷의 새 아이덴티티에 무엇을 담고 싶은지 한참을 늘어놨다. 인아씨가 열심히 알겠다는 표정으로 내 말을 들어준 덕분에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겠는 순간까지 말을 많이 했다. 할 말 없이 말했다는 게 아니라 생각 이상의 말을 했다는 의미다.

“게으름뱅이를 위한 기본소득 같은 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스위스 기본소득 운동에서는 동전을 시각적으로 이용했는데, 우리도 현금이라는 상징을 그냥 당당하게 들이밀어도 좋겠구요. 힙스터들한테 잘 팔리고 싶다!!!” 기억나는 건 그닥 안 중요한 말 뿐이다. 우리가 굿즈를 만들자 쿵짝쿵짝 하며 동전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동전이 생각보다 꽤 값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회의를 마치고 빵을 먹으러 갔다. 빵을 먹고, 길상사에 갔는데 반바지를 입고 그냥 가면 안된다며 다리를 가릴 수 있는 보자기 치마 같은 것을 입구에서 나눠주고 있었다. 알고보니 그 날 높은 스님이 온다나. 절의 맞은 편 가게 벽면에서 효재님이 보살처럼 웃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남은 여름 동안도, 다가 온 가을에도 모두모두 너무 바빴고 겨울에야 간신히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기청넷의 개발자인 주연씨도 함께 참여하자 팀 다운 느낌이 났다. 셋이 모인 첫 워크숍 날, 인아씨가 준비해 온 BIYN의 아이덴티티를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깔끔한데 볼드하고 귀엽다는 것이었다. 다른 것보다 청년의 스테레오 타입처럼 톡톡 튀거나 발칙하지 않아서 좋았다. Y가 그냥 그 모양답게 톡 튀어나와있을 뿐. 그래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색이 들어갔으면 싶어 인아씨에게 검은색 말고도 옵션을 달라고 요청했다. BIYN의 디자이너는 똑 부러지게 고개를 저었다.

색이 필요하면 로고가 사용될 때 배경색을 바꿔. 로고는 무조건 검정이야. 색이 들어가면 너무 귀여워 보인단 말이야. 대신 배경색을 바꾸면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색을 쓸 수 있고, 얼마나 좋아?”

나도 귀여운 척은 싫지만 그래도 색을 좀 지정해주세요. 통일된 색이 있는게 굿즈나 그런 거 만들기도 낫지 않아?”

아니야. 기본소득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잖아. 얘는 그렇게 쓸 수 있게 나와있어. 이렇게 그림을 뒤에 러프하고 귀엽게 덧붙이거나, 배경 색을 바꾸거나 하면서.”

인아씨가 만들어 온 몇 가지 예시를 보여주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여름에 했던 중요한 말들이 유추되었다. 인아씨가 다 기억을 한 것인지 흡수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기본소득이 관점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특정한 문제에 대한 답처럼 소개하는 사람들이 자기 답으로 다른 답의 가능성을 지우는 것 같고, 그 보다는 현재의 여러가지 문제를 반영할 수 있는 관점으로서의 기본소득 운동이 발전되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이 의제가 보편적인 삶의 문제이자 사회 전환의 문제로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면 좋겠고, 누구나 자기 문제를 기본소득을 통해 해석할 수 있으면 좋겠고, 당연히 이곳의 기본소득 운동에서는 더 실질적인 문제를 가진 소수자의 목소리에 가중치가 실리면 좋겠고. 그런 말들을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내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납득하고 있는 동안 주연씨와 인아씨는 이미 새 웹사이트 와이어 프레임의 톤을 맞추고 있었다. “선이 4픽셀이라구요?” “네.” 너무 큰 텍스트와 너무 두꺼운 선들이 모여있으니 조금 흥이 나고 어이없게도 보기가 좋았다. “이게 브랜딩이야. 히워나.” 그래그래 알겠어. 그걸 보니까 큰 거리에서 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되어 누구나 그렇게 함께 말할 수 있는 그런 운동을 하면 되겠다. 그리고 이걸 띄우고 나면 비로소 나는 일단 딱 하나의 큰 목소리가 되어볼 수 있겠네. 누군가를 대표하느라 바짝 긴장한 느낌을 감추기 위해 길고 긴 실 같은 걸로 몸을 한참 감싼 주장이 아니라. (끝)


p.s.- 깨달음을 주는 사람. 이것 너무 한국의 중년 남성 지식인들의 판타지적 상황인 것 같은데, 역시 홍두깨(잡지 쿨 3호 참조)의 전적을 가진 인아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