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곁눈질의 스토리텔링 : 웹툰 ‘구름의 이동속도’ (김이랑)

가끔 그냥 사는 게 기적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밥벌이 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것, 일상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이 있다는 것, 내 한 몸 쉴 수 있는 작은 방이 있다는 것, 가끔은 스스로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줄 수 있다는 것. 누구에게나 주어진 수준의 삶 같고 때로는 벗어나고 싶은 생활이지만,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던 어린 시절의 마음을 떠올려 보면 지금 평범한 어른으로 살고있는 것이 새삼 놀랍다. ‘내가 어느새 여기까지 왔을까?’

구름의 이동속도

주간 연재로 총 65화. 개성있는 네 명의 십대 인물들의 두 학기를 따라가는 웹툰 <구름의 이동속도>(김이랑)를 읽다 보면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비슷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아이들이 언제 이렇게 성장했지?’ 이 물음표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걸 봤을 때의 놀라움이라기보다는 너무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버렸을 때의 자각에 가까운 것이다. 어느 틈에 다음 계절의 바람이 훌쩍 불어왔을 때의 기분좋은 당혹감 같은 것.

이런 자연스러움은 <구름의 이동속도>가 지닌 여러 미덕들의 원천인 동시에 총합이다. 나는 이 작품이 웹툰이라는 장르가 구현할 수 있는 리얼리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생활툰의 디테일함과도 다르고, 속도감있는 스토리텔링으로 독자를 작품에 몰입시키는 개연성에 기인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김이랑 작가는 그저 대다수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 그러니까, 무사히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의 첫 한 걸음을 우연과 필연의 비율을 맞춰 정교하게 현실적으로 재현한다. 이 글에서는 이 성취가 어떤 서사와 형식을 통해 얻어지는지, 또 이로 인해 추가되는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지 짚어보고자 한다.

어긋남의 개연성

좋은 드라마라면 입체적인 인물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네 명의 주요 인물들에게도 제각기 복잡한 사정이 있다. 주인공 상완은 입원 중인 아버지와 바쁜 엄마 대신 아래로 줄줄이 딸린 동생 셋을 돌봐야 하는 녹록지 않은 환경 속에서 ‘명문대 진학, 대기업 입사, 자산가’라는 명확한 꿈을 키워나가는 성적우수 모범생이다. 그런데 운이 어찌나 없는지 집에 불까지 나서 이제는 엄마가 운영하는 노래방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한다. 겉으로는 냉정하고 효율만 따지는 듯 보이지만 요령이 없을 뿐 실은 마음 약한 구석이 많다. 이런 상완의 사정은 알지 못한 채 그를 짝사랑하는 해준은 늘 나사 하나 빠진 듯 태평해보이지만 사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단짝 친구 유나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방황 중이다. 해준의 소꿉친구인 재규는 장난기 넘치고 친구들도 잘 챙기는 인기인이지만 집에서는 늘 형에 비교당하는 못난 동생 신세다. 상완의 관심을 끄는 상급생 연주는 뭐든지 잘하는 영재다. 약점이라고는 없어보이지만 사실 어른스럽고 무심한 표정 아래 담임 교사였던 서준쌤에 대한 애정과 배신감을 숨기고 있다. 마지막으로 목소리는 주어지지 않지만 반에서 겉돌던 나리가 허물없는 해준과 친해지면서 조용히 함께 성장한다.

이 이야기는 이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사진부에 느슨하게 모여들면서 이어진다.

성장물 <구름의 이동속도>는 첫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도, 꿈을 이루는 이야기도, 땀 흘려 승리를 쟁취하는 이야기도, 가면을 벗고 진정한 나 자신으로 재탄생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 작품은 그냥 주인공들이 비로소 삶을 진전시킬 힘을 얻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물론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는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남다른 지점은 여기있다.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곁눈질하며 나아가는 이야기랄까.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분명 작품의 시작과 끝을 담당하는 상완이지만, 그 홀로 중심에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네 명의 인물들 각자의 사정을 배경으로 돌림노래처럼 이야기가 켜켜이 쌓이는 전개방식을 택하고 있다. 선형적인 기승전결 대신 작은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는 동안 인물들은 어느새 성장한다.

물론 여러 인물들이 각각의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구조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도, 시트콤에서도, 소설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다. <구름의 이동속도>의 개성을 좀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 보기에 비슷한 시기에 같은 플랫폼에서 연재된 성장물 <야채호빵의 봄방학>(박수봉)과의 비교가 용이할 것 같다. 이 작품 역시 야채라는 온화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천천히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이 두 작품이 인물들을 연결짓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왕따와 학대 수준의 사교육이라는 현안을 담고 있는 <야채호빵의 봄방학>에서는 왕따의 피해자였거나 방관자였던 인물들이 어렵사리 진심을 털어놓고 마침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한다. 즉, 여기서는 인물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구름의 이동속도>로 돌아오자면, 아이들은 상완을 중심으로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친구가 되지만,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야채호빵의 봄방학>에서는 서로가 함께 해가는 과정 자체가 사건화되어 있다면 <구름의 이동속도>도 첫 상당부분을 인물들이 사진부로 모여드는 과정에 할애하기는 하지만 사건은 그냥 사건이고 인물들이 계속 마주치게 하는 장치일 뿐이다. 하지만 이해 없이도 구원과 성장은 일어난다. 예컨대 상완은 만사에 의욕 없는 해준을 움직이는 동인이지만, 이를 계기 삼아 마침내 앞으로 내달리는 일은 해준의 결정이지 상완의 구원이 아니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인물들을 이끄는 건 오히려 오해와 어긋남들이다.

어긋남의 연속을 통해 개연성을 직조하는 기술은 <구름이 이동속도>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십분 발휘된다. 있는 힘껏 견디고 있는 사람의 감정은 곧잘 엉뚱한 곳에서 터지기 마련이다. 힘든 환경 속에서 한 학기의 노래방 거주 생활을 견뎌온 상완은 사람 좋은 소리만 하는 아버지에게 느끼는 답답함을 쌓아두었다가 속상함을 털어놓는 해준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고만다. 해준의 사정을 잘 아는 재규는 타인의 어려움을 무시하는 상완에게 화를 내고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기지만, 종국에는 상완이 특유의 솔직함으로 재규에게 작은 해방감을 주며 갈등을 해소하는 예기치 못한 결과로 이어진다.

막상 상완이 해준을 마주보고 자신의 말에 대해 사과를 건네는 건 한참 시간이 지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의 일이다. 아버지에게 전하지 못한 마음이 함께 담겨있는 이 뒤늦은 사과에 해준은 용서의 말로 답하는 대신 내내 자신이 회피해왔던 고백의 말을 건넨다. “좋아해.” 어쩌면 이 말을 꺼내는 해준에게 상완의 대답은 안중에 없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 순간은 해준이 죽은 유나에 대한 죄책감을 넘어 비로소 자신의 삶을 직면하는 순간이다. 화면에 단촐하게 떠있는 말풍선을 보며 독자는 이 이야기가 결국 이 한 마디의 힘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성장물 <구름의 이동속도>는 트라우마나 약점을 뛰어넘으며 성장으로 직진하는 플롯이 아니라 이렇게 딴청을 피우며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사진부에 모인 연주, 해준, 상완, 재규, 나리는 함께 놀러 가거나 학교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축제를 위한 전시를 준비하기도 한다. 인물들의 변화는 그 과정에서 한 번씩 이야기에 방점을 찍을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스릴러나 공포물에 가까운 에피소드들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느긋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각자의 세계와 개인의 내면을 다루는 법

이는 독자에게는 편안하지만 구현하기 쉬운 이야기 전개방식은 아니다. 명확한 인과관계로 이루어진 ‘떡밥 회수’가 아니라 왠지 모르게 납득이 되는 우연과 이야기들의 연속을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지만 저 인물이라면 저렇게 행동했을 법도 하다는 느낌을 전해야 하는데, 독자에게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으면 자칫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구름의 이동속도>는 이를 만화다운 능숙함으로 풀어낸다. 만화는 작가의 선택권이 폭넓은 서사 장르다. 소설이나 논픽션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텍스트의 체계 밖을 벗어날 수 없고, 영화는 영상으로 최대한 세계를 재현하며,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은 이러니 저러니해도 실제의 움직임을 모방하며 흘러간다. 하지만 만화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동시에 쓸 수 있고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시간과 공간을 단절시키며 세계를 생략하고 필요에 따라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어 과장할 수 있다. <구름의 이동속도>는 네 사람의 목소리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방식을 택하는데(때로는 선생님과 같은 관찰자의 목소리가 짧게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소설이라면 설명이 많이 필요하고, 영화라면 이질적으로 느껴졌을 장치다. 하지만 만화에서는, 특히 스크롤 웹툰에서는 인물의 얼굴과 말투만으로 자연스럽게 전환이 된다. 이는 독자가 자연스럽게 인물들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경로가 된다.

또한 이 작품은 배경으로 현실에서 포착한 공간들을 사용한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학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시내, 익숙한 연립주택과 아파트, 평범하기 짝이 없는 노래방 공간 등. 심지어 해수욕장 같은 비일상의 공간도 소주병이 곳곳에 늘어서 있는 한국의 그 해변이 등장하는데, 이는 이 이야기가 주요 인물들만으로 이루어진 작은 사회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실제로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것 같은 열린 공간감을 제공하는 효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렇게 충분히 복잡하고 넓은 현실 세계가 배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인물들 사이에도 어느 정도 거리감이 허용된다.

해준과 재규, 상완의 사이가 아무리 친해져도 이들은 각자 다른 맥락, 다른 세계 속에 속해있다. 재규의 세계가 게임과 사교육의 세계라면 상완의 세계는 TV프로그램과 병원, 그리고 입시의 세계다. 해준의 경우, 유나의 빈 자리와 엄마의 무관심 사이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지 못한 채 의미 없는 일상을 무탈히 보내고 있을 뿐이다. 말풍선과 인물들의 내레이션은 주로 이 간극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예가 한 화의 마지막에서 함께 벌인 일들을 지나 각자가 혼자가 되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을 삽입하는 것이다. 이 형식은 일종의 마침표로 작품 내내 여러 번 반복된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이 작품은 인물들 사이의 간극을 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물들 사이에 충분히 거리가 있기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스스로 변화의 계기를 찾게 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구름의 이동속도>에서는 해준이 충동적으로 상완의 사진을 찍는 순간부터 시작해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사건은 언제나 인물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이는 매개로, 적절한 생략과 기호들, 인물들의 설명을 사용해 빠르게 전개된다. 독자가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작가가 공을 들이는 부분은 인물의 감정이 표출되는 순간들이다. 작품의 많은 부분을 인물들의 목소리에 기대고 있음에도, 본심이 드러나는 결정적인 순간은 그림으로 표현된다. 마음을 ‘만화적으로’ 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순간들은 언뜻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 풀린 신발끈에서 유나를 떠올리는 해준의 옆모습이나, 바닷가에서 실눈을 뜨고 순간의 평화를 즐기는 상완의 얼굴, 서준쌤을 올려다보는 연주의 눈빛 묘사는 탁월하게 정확하다. 실제 인물의 연기나 사진을 통해서 포착할 수 있을 것 같은 감정의 미묘함이 작가 특유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그림체를 통해 전달되는 순간들은 퍽 감동적이다.

평범한 가난

편안한 그림체와 담담한 유머감각 때문에 잘 티가 나지 않지만 사실 <구름의 이동속도>의 에피소드들은 죽음, 방화, 사제 간의 사랑과 같은 무척 자극적인 소재들로 이루어져 있다. 부당한 학칙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학괴 에피소드는 스릴러에 가깝다. 이 작품이 이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에 갖는 미덕은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놓인 인물들도 평범하게 느껴지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상완이 그렇다. 방화범이 집에 불을 질러서 노래방에 숙식하는 남학생이라니. 신문 사회면에서 맞닥뜨렸다면 도대체 어떤 심정일지 가늠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상완의 본심은 작품 속에서 종종 악몽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하는데, KBS2의 <안녕하세요>를 참조한 듯한 버라이어티 쇼의 구경거리가 되어 시청자들에게 값싼 동정심을 사는 꿈은 그가 처한 취약한 상황을 불현듯 냉정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그런 시청자들이 아니라 상완에게 보편의 목소리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상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화가 나있을지언정 자신을 약자나 동정의 대상으로 타자화하지 않는다. 제 사정을 알 길 없는 친구들이 돈을 더 쓰게 만들었을 때도 친구들에게만 화살을 돌리지 않고 한 푼 두 푼 계산해보고 있는 자신의 찌질함을 돌아본다. 자존심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상완의 행동이 올바르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정상적’ 환경에 놓인 상완에게서 드러나는 억울함이나 냉소, 후회와 자격지심 같은 감정들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야기의 초반부, 재규가 자신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상완에게 의문을 품을 때 독자가 자연스럽게 마음을 이입하게 되는 쪽은 상완이다. 상완이 불쌍해서 이해해주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럴만 하다’고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주변화 된 인물들에게 보편의 목소리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오늘날의 서사물들이 의식해야 할 윤리적 책임이다.

이는 비단 상완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미성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환경에 휘둘릴 수 밖에 없다. <구름의 이동속도>는 외부 환경에 의해 주체성을 상실한 이 십대들에게, 그 중에서도 목표가 있는 사람보다는 목표가 없는 사람에게, 상실과 애도 밖에 있는 사람보다는 그 안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에게, 그러니까 대개의 경우 할 만한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그들 자신의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는 지점까지 기다려준다. 그런데 비전을 갖기는커녕 무엇의 뚜렷한 안티테제조차 되지 못한 채 막연히 방황하는 시간들은 사실 한국사회의 누구나 겪는 시간이다. 심지어 평생을 그렇게만 살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직접 보고 경험했기에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느린 성장서사는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다.

희미하지만 명확한 희망

<구름의 이동속도>가 그리는 사회는 어둡다. 아이들은 이기적이고,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집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가장 친한 친구는 어느 날 늘 오가던 건널목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세상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세상은 관심이 없고, 이런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더 나쁜 점은 그래도 이 세상의 일상은 평화롭게 계속 이어져 간다는 것이다. 유나가 죽어도,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삶은 계속된다. 불행히도 이는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를 희미하지만 명확한 희망까지 데려간다. <구름의 이동속도>에는 나쁜 일들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반복되어 밀려오는 세상에서, 구름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삶은 변화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명확한 인과관계가 아니라 부작용의 부작용들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현실만큼이나 개연성이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고 그 자연스러움이 이 희망을 신뢰할 수 있게끔 한다. 언젠가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될지 모른다. 그건 생활을 정리하고 사진가의 꿈을 시작하는 서준쌤처럼 큰 변화일 수도, 언젠가 해준을 만나러 독일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상완처럼 작은 변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곁에 있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 복잡한 세상에서 어떤 우연들이 우리의 삶에 변화의 계기로 찾아올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계기를 만났을 때, 변화를 선택하는 것은 바로 내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 우리는 언젠가 건널목을 건널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구름의 이동속도>가 오늘의 우리에게 긴 시간을 들여 선사하는 메시지다. (끝)

[에세이] 역사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때

: 로마(2018, 알폰소 쿠아론) @상상마당

모리님께.

일주일만에 첫 편지를 보냅니다.[1]

그날, 집에 돌아와 함께사는 친구에게 오늘 극장에서 되게 오랜만에 졸았다고 말했더니 가볍게 웃고나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근데 극장에서 자는 거 은근히 기분좋지 않아? 어렴풋한 빛에 깨잖아. 되게 기분좋게 일어나져.” 맞아 정말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아마도 “어렴풋한 빛”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것인지, 그 순간 마음 속에 그날 본 영화가 마치 선잠에 들어 꾼 꿈처럼 희미하게 떠오르더니 사라졌어요. 귓가엔 어린 시절 저녁께쯤 되면 들리던 두부 파는 아저씨의 종소리가 초여름의 날벌레 소리와 함께 웅웅 맴돌았고요. 그건 참 오랜만에 보는 내면의 풍경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영화라는 게 종종 심상을 남기기도 하는 거였지.’ 어떤 멋진 장면의 인상이나 줄거리나 인물이 기억에 새겨지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원래 있었던 느낌들을 일깨웠던 영화들을 모처럼 떠올렸어요. [2]


‘로마’는 롱테이크가 자주 나오는 흑백 영화였지만 명상적이기보다 너무나 구체적으로 감각을 자극하는 영화였던 것 같아요. 아니, 어쩌면 이건 정말로 명상적인 특징일지도 모르겠네요 감각에 집중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래서 잠이 솔솔 왔던걸까…(조조를 보기 전 날에는 일찍 자는 걸로.) 아무튼 우리가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잠시 이야기 나누었듯이 상징으로 가득한 영화였는데요. 너무 상징적인 작품들은 종종 관객을 조금 머쓱하게 하잖아요. 삶에 대한 무거운 의미부여가 호들갑스럽게 느껴진달까. 저는 그렇더라고요. 사실 그래서 감독의 전작인 ‘그래비티’를 보면서는 조금 힘들었거든요. 이야기의 배경으로서의 우주는 그 자체로 일종의 메타포가 되어버리기도 하니까. 로마에서 상징들이 지나가는 경험은 그와는 달랐습니다. 역사 속의 로마도, 이탈리아의 로마도 아닌, 멕시코의 로마를 배경으로, 상징들은 생활의 시공간 속에 촘촘히 스며들어 있었고, 아주 유려한 시청각적 경험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잘 재현된 보편은 개별적인 경험들을 소환합니다. 그래서였던 것 같아요. 그날 저녁,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6.25 전쟁 이야기를 물었던 적이 있는데, 대답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유 그때 정신 없었지, 뭐. 그런 느낌으로. 그저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네요. 카스테라를 좋아하고 매일 매일 노인대학에서 배운 가곡을 복도까지 들리도록 크게 불러서 엄마를 민망하게 했던 우리 집의 할머니가 일제시대도, 6.25 전쟁도, 유신정권도 지나온 사람이라는 것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도 그런 시대들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없었어요.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는 할머니의 것이었죠. 어렸을 때 공부를 더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돈 벌라고 안시켜줬다는 이야기 같은 것. 하지만 무의식중에 일본어 동요를 흥얼거리다가 짜증을 내는 건지 웃는 건지 헷갈리는 말투로 아이고 이건 까먹지도 않는다고 말할 때, 제게는 ‘역사’라고 할만한 것이 갑자기 할머니의 얼굴을 하고, 할머니의 목소리로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는 했습니다. 할머니가 나보다 어렸을 때 할머니는 쇼죠지의 너구리에 대한 동요를 불렀구나.

할머니에게 시대를 평가하는 역사적 관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듯,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할머니는 기억해야 할, 드러나는 존재는 아니었겠죠. 실제로 우리 할머니와 같은 사람들을 부르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어요. 이를테면 할머니는 ‘국제시장’의 등장인물도, ‘응답하라 시리즈’의 등장인물도 아니거든요. 시골에서 상경해 식모살이를 하거나 공장에 다니지도 않았고, 결혼해서 주부가 되지도 않았어요. 간호사로 보건소에서 일하면서 홀로 엄마를 낳아 모녀가정을 꾸리셨죠. 그 시대의 역사는 전문직 여성도, 비혼모도 바라보지 않았고요. 부끄럽게도 멕시코의 사정을 잘 모르지만, 로마의 주요 인물들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네모난 집은 역사적 스펙터클에서 비껴서 있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더욱 부각되는, 이 영화의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은 클레오가 우연히 페르민과 만나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 뒤 양수가 터지는 때였는데, 제게는 그 순간이 역사와 클레오가 서로를 알아보는 사건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재현의 예술로서 영화는 옛날 일에 대해서 이런 만남을 주선할 수 있네요. 감탄했지만 클레오의 상황은 너무 가혹했고, 우리들에겐 불행한 일을 겪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남성 감독을 의심할 권리가 충분히 있지 않은가요? 저는 곱씹었어요. 이 영화의 사랑을. 그건 차별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는 분명 아닌 것 같았습니다. 착취와 돌봄과 구분되지 않은 채로 인물들의 삶을 보호하는 무언가였어요. 긍정할 수 없지만 부인해서는 안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지난 사정.

여기까지 글을 적고 나니 어떤 보편적인 질문들이 제게 떠오릅니다 : 산다는 일에서 살아남는 일의 비중은 얼만큼일까요? 살아남는 일은 사랑하는 일을 얼마나 일그러뜨릴까요? 아니, 사랑은 어떤 일그러짐 속에서 가능한 것 일까요? 나는 (어쩌면 우리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꼭 근사하지만은 않은 사랑을 한 결과 지금 살아있는 것이구나. 이 발견에 대해 어떤 감정도 들지 않는데요, 다만 흑백의 하늘처럼 애매한 질문들이 한 동안 답 없이 떠다닐 것습니다. 상징은 심상으로 다가와서 결국 질문이 되었네요. 모리님께는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천천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19년 1월,

희원 드림.


[1] 이 글은 이모리님과 함께 월 1회 함께 영화를 보고 글을 쓰기로 해써 쓰여진 글이다. 회신은 백 편의 에세이에서 읽을 수 있다. 영화는 두 편을 보았고, 글은 꼭 한 번 오갔다. 가끔 모리님이 준 단풍모양 향을 피운다. 종이 향을 맡고 싶을 때.

[2] 페드로 코스타의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 아녜스 바르다의 ‘다게레오타입’. 테렌스 데이비스의 ‘먼 목소리, 조용한 삶’.

[리뷰]가장 인간다운 시간 : ‘소공녀’와 ‘레이디 버드’를 같은 날 보았다

“좋지.” 모레 집에서 멀지 않은 극장에서 조조로 영화를 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가볍게 답하고 보니 저녁에 모처럼 영화 약속을 이미 잡은 날이었다. 내가 지난 해 극장에서 본 영화는 총 다섯 편이다. 그런데, 하루에 영화 두 편. 그것도 여성 원탑 주인공인 영화로만.

나는 작은 우연으로부터 의미를 건져올리는 것을 좋아한다. 오전에는 소공녀(전고운, 2017)를, 저녁에는 레이디 버드(그레타 거윅, 2017)를 연달아보게 되니 두 영화가 같은 카테고리로 묶일 것 같았다. 방황하던 현대 여성이 자신의 자리를 찾는 여성 성장물 아닐까. 극장에 두 차례 들어갔다 나와 보니 완전히 틀린 예측이었다. 우선 두 영화는 아주 달랐고,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반성을 딛고 성장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리뷰] 그리고 그녀는 새처럼 그것을 가볍게 넘었습니다 : 더 포스트 (2017, 스티븐 스필버그)

좋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적고, 권력을 가진 좋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더 적다. 여성이 힘을 얻는 이야기는 대체로 부정의하다. 사회가 그런 방식만을 허락하고 그런 이야기만 선호해왔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지렛대 삼아 통쾌하게 모든 걸 역전시켜버린 영화로 <미스 슬로운>(2016)이 있었던 것 같다. <더 포스트>의 주인공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은 이 점에서부터 이미 예외적인데 가족경영권이 대대로 내려오는 워싱턴 포스트지의 CEO이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정통성을 물려받은 여성이다. 물론 여기에는 우여곡절이 있다. 원래 후계자였던 남편이 자살하여 그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더 포스트>는 권력을 가졌지만 그걸 사용할 입을 가지지 못한 캐서린이 미국이라는 세계를 바꿔놓을 한 마디를 해내는 사람이 되는 이야기다. 스필버그는 자기 세대의 가장 극적이고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건(결국 워터게이트 폭로로 이어진다)의 주인공으로 여성을 비추고, 잃어버릴 것, 지킬 것이 있는 여성이 모든 걸 걸고 대의를 추구할 때 그 용기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 숭고함을 전한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에 대해서, 외계생명을 사랑하는 아이에 대해서 그러했듯이.

남자들의 세계에서 경영위기에 맞서 회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더 큰 가치를 위해 큰 결정을 내리는 그녀에게 힘을 주는 것은 그녀의 가족, 충언을 아끼지 않는 남성, 그리고 결국에는 그녀 자신이다. 워싱턴 포스트를 자유를 수호하는 ‘언론’으로서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 이 사회적 신념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분리되지 않고, 나는 이 점이 싫지 않았다. 우리들은 이런 식으로 강하기도 하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좀 더 솔직하고, 우리를 응원한다. 우리가 현명하면서도 사랑과 다정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 우리의 덕목이며 역량이다. 자기 좆이 가장 중요한 사람은 절대로 못해낼 일이다.

당연하지만 너무 스필버그 영화라 그가 페미니즘에 재능기부를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비꼼 아님) 그는 만약 자신이 지금까지 발휘해 온 장기, 그러니까, 우정과 용기의 덕목을 배우들에 담아내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의 리듬을 부여하는 것(서류를 폭탄처럼 찍는다), 존 윌리엄스의 음악을 풍성하게 활용하는 것을 다른 대상을 다른 각도로 비추는 데 사용한다면 얼마나 더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지 알았다. 이건 남성 캐릭터들을 보면 알 수있다. 이 영화의 정의로운 남자들은 전에 없이 어딘가 허영기가 있다. 그들은 자신이 정의의 수호자로 역사에 남기를 기대한다. 편집장 벤(톰 행크스)이 부인 토니(사라 폴슨)와 대화하는 장면은 이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같은 여성으로서 토니는 캐서린 그레이엄이 오로지 잃을 것 뿐인 결정을 용기있게 해냈고, 그것이 벤의 경쟁심리와 공명심보다 숭고한 것임을 우아하고도 명확하게 지적한다.

퍽 아름다운 영화이기도 했다. 미국의 자유를 수호한 어떤 기여도 빼먹지 않으려는 그 속도와 이동의 기술이 근사했다. 이렇게 이동하며 모두 담아낸다

: 전쟁의 현장과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결심한 내부고발자의 눈동자, 함께 자료를 만드는 운동조직, (거짓을 전하는 장관의 입), 주식 시장 상장을 논의하는 캐서린과 프리츠 사이의 신뢰와 애정, 백악관과의 적대적인 관계를 알리는 전화벨 소리, 캐서린과 편집장 사이의 격의없는 긴장관계.

: 기사를 쏘는 파이프, 활자를 짜맞추는 사람들, 이야기를 배달하고 전하는 사람들, 신문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기계, 산업 안의 사람, 산업을 유지하는 국가, (그 무엇과도 관련없이 고립된 모습으로, 우스운 그림자로 등장하는 백악관의 닐슨), 국가를 수호하는 헌법, 헌법의 주권자인 국민, 여성을 응원하며 끝없이 늘어선 여성들. 그들이 보내는 눈빛들 속을 걸어나가는 캐서린 그레이엄. (끝)

어쨌든 그녀는 그런 시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시험을 치르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녀에게 경고와 충고의 고함을 지르는 주교, 사제장, 박사, 교수, 가장, 교육자들을 보았고, 그녀가 그들을 보지 않았기를 바랐지요. 당신은 이런 일을 할 능력이 없고, 저런 일은 해서는 안 됩니다! 대학 연구원과 학자 들만이 잔디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인들은 소개장 없이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열망을 품은 우아한 여류 소설가들은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처럼 그들은 경마장의 울타리에 몰려든 관중들처럼 그녀에게 계속 소리 질렀고, 그녀가 치를 시험은 오른쪽이나 왼쪽을 돌아보지 않고 울타리를 넘는 것이었지요. 만약 당신이 욕설을 퍼붓기 위해 멈춰 선다면 당신은 파멸이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지요. 비웃기 위해 멈추어도 마찬가지라고 말입니다. 망설이거나 더듬거린다면 당신은 끝장이다. 오로지 뛰어넘는 것만을 생각하라. 나는 그녀의 등에 내 온 재산을 건 것처럼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새처럼 그것을 가볍게 넘었습니다.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민음사, 이미애 역 쏜살문고 판 138p)


P.s. – 영화를 볼 기회는 친구가 만들어준 것이었다. 내 옆에 앉아있는 이 여성 친구가 어떤 기분인지 생생하게 느끼며 함께 볼 수 있어 참 좋았다.

[비평] 수치심이 동력인 사회가 어떻게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 에드워드 양의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을 보고 하나 그리고 둘(2000)을 회상하며

0. 실체없는 공포

나쁜 것은 모두 어디서 올까? 내가 어릴 때 개구리 소년들이라는 그림자가 교실에 드리워 있었다.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고 했다가 실종된 어린이들.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많았는데도 항상 동갑내기들로, 꼭 이승복 어린이 동상처럼 박제되어 있었다. 개구리 소년들의 교훈은 책으로, 뉴스로, 벽보로, 훈화로 일 년에도 몇 번씩 나를 덮쳤다. 언젠가 자연백과에서 본 독개구리의 무늬가 스산하게 눈 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왜? 왜? 죄없는 어린이들을 납치하는 무서운 어른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이렇게 두려운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1. 완벽한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1960년대 초에 실제로 사회적 화두가 되었던 대만 최초의 미성년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라고 한다. 영화에는 대만 전후 사회의 총체가 놀랍도록 완벽하게 담겨 있다. 작품의 내적 완결성이 자로 잰 듯 완벽하다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영화라는 양식을 통해 세계를 너무 실제에 근접하게 재현하고 있다. 물론 인공적인 플롯이 있지만 그것이 전개되는 세계는 정말 딱 현실만큼 우연적이고, 부조리하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동행에게 흥분해서 말했다. “영화라는 장르가 세계를 최대한으로 밀도있게 담아낼 수 있는 서사의 크기라는 게 있다면 딱 이 만큼일 것 같아.”

: 한 가족과, 구성원 각자의 도전들. 학교와 그 이면, 병원과 공연장, 국가와 군대, 이웃들이 사는 골목. 몇 번의 살인사건과 두어 개의 삼각관계.

주인공인 샤오쓰가 속한 십대 소년들의 세계는 전후 대만 사회의 속살을 보여주기에는 최적화 된 렌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춘기 아이들은 어른들을 모방하여 조직적으로 힘의 위계를 따른다. 둘째, 게다가 어른들보다 더 적나라하게 폭력을 주고 받는다. 셋째, 아이들은 어른들이라면 말없이 수긍할 부조리한 세상 이치를 납득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래서 이 세계는 영화가 되기에, 사건이 벌어지기에 최적화 된 장이다. 고령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사회 전체의 폭력과 모순이 아이들의 세계로 유입되며 극단적인 사고로 사건화 된 결과다. 주류 사회에서라면 의심과 권력의 기제를 통해 어디로든 적당히 통제되며 계속 굴러갔을 일이, 좁고 밀도높은 이 하위 사회에서는 뚜렷하게 증폭된 것이다. 사건의 트리거가 되는 몇 가지 우연 역시 십대 아이들의 세계라는 특성에 기인한다. 이를 테면 천장 서까래 위를 살펴보는 건, 그래서 2차 대전 때 일본인들이 숨겨둔 칼을 발견하는 건 아이들이기에 하는 짓이다. 관객은 미숙한 세계를 어이없이 바라 볼 뿐이다.

2. 샤오쓰

샤오쓰라는 인물은 이 십대 소년들의 세계를 약간은 주변인적인 위치에 서서 관객에게 보여주다가, 일거에 타인의 목숨을 빼앗음으로서 자신의 세계를 파멸시키고 사회에 경악을 안긴다.

이 남자아이는 얼마 전 갑자기 키가 껑충 크고 말 수를 잃은 모양새로, 긴 러닝타임 내 좀처럼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다. 극 초반에는 갱단 놀음에 심취해 있는 주변 남자애들에 비해 속이 깊은가 싶다가도, 제 생각을 내 비칠 때 보면 그렇지도 않다. 그가 벽장 속에서 일기장에 적는 문구에는 유치한 복수심과 영웅심리가 넘실거린다. 여느 아들들과 같이 자신의 정의를 구현하며 살고 싶다는 욕망을 자연스럽게 갖는 평범한 남자애인 것이다. 그 정의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탱크와 버스가 태연하게 나란히 달리는 세계에서, 일본도와 총탄에 매혹되어버리는 남자아이.

이런 그가 용기를 얻는 대상은 부당한 교사나 가게 주인처럼 소소한 불의에 맞서는 아버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 말하는 소공원파의 전설적 보스 허니, 자신의 미래를 응원하는 가엾고 고결한 여자친구 밍이다. 영화는 이 모든 걸 하나씩 무너뜨리며 진행된다. 아버지는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PTSD에 시달리고, 허니는 상대 갱단의 보스에게 비겁하게 살해당하고, 아픈 모친과 사는 ‘예쁜 여자아이’ 밍은 생존을 위해 차악의 길로 들어선다. 어른의 사정으로 보면 이 불행들을 작동시키는 힘은 너무나 관습적이지만 탐정소설의 주인공조차 아닌 평범한 십대 남자애에게는 이 힘이 작용되는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그에게 이 모든 일은 어둠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연하게도 샤오쓰의 정의구현은 전혀 엉뚱한 과녁을 겨누고 만다.

3. 동아시아의 어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시작부터 어둠과 빛을 장치로서, 메타포로서 아낌없이 사용한다. 예컨대 첫 장면에서 샤오쓰는 성적이 떨어져 학교 주간부에서 야간부로 옮겨가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 있다. 몰락에 대한 적나라한 암시. 1년 후, 학교 근처에 자리한 영화세트장에서 샤오쓰는 랜턴을 훔쳐 나오고, 그것은 시종일관 강한 존재감을 가진다. 영화에서 정말로 중요한 일, 실질적인 일은 어둠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갱단이 굴러가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의 중대사도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공유된다. 어둠의 세계는 빛 앞에서 스스로를 숨기는 데 능숙하다. 죽일 듯 멱살잡이를 하던 아이들도 교사의 눈길이 닿으면 맞춘 듯 놀던 행세를 한다.

나는 이 영화가 어둠을 다루는 방식을 회고하면서, 모국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했던 야심적인 영화들의 면면을 떠올려보았다. 예를 들어 서부극이나 범죄영화의 장르를 빌려서 미국이 폭력 위에 지어진 나라라는 걸 폭로하는 시도들이 있다. 서유럽의 영화들은 계급 착취의 모순과 위선을 드러낸다. 일본 영화들은 개인 안에서 얼마나 어둠이 거대해질 수 있는지 제어장치 없이 탐험해서 나를 질리게 만들곤 한다. 독일 영화에는 기성세대의 완고한 어둠을 바라보다 미쳐버린 청년세대들이 등장한다.

이 거칠게 엮은 서로 다른 사례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둠과 빛이 공모 관계에 있다는 것까지 밝혀낸다 치더라도 적어도 이 둘을 분리시킨다는 점이다. 여기서 어둠과 빛은 서로 지배하고 침범하는 관계다. 하지만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어둠은 이와 다른 차원에 있다. 이 사회에서 어둠은 그냥 기본적으로 모두의 ‘밝은’ 일상에 배태되어 있는 것이다. 샤오쓰의 아버지는 어느 아침 갑자기 공안부 비슷한 곳에 끌려가 알 수 없는 이유(말 그대로 이유가 등장하지 않는다)로 며칠 간의 고초를 겪는다. 가족들은 수심 속에서도 일상을 태연하게 이어나가고 아버지는 어느 밝은 낮 갑자기 돌아온다. 국가의 폭력은 낮에도 횡횡하고 밤의 이야기는 개인들의 몫이다. 즉, 빛이자 암흑의 시작과 끝은 바로 국가다. 갑자기 만들어진 국가에서 당연히 이러한 모순은 가족, 학교, 친지들까지 모든 공동체에 연결되어 있다.

4. 수치스러운 K

건전한 가정, 자랑스러운 국가가 빛이자 어둠인 사회에는 체제에 대한 혁명도, 그로테스크한 사적 관계도, 고발도 없다. 있는 것은 전방위적인 의심과 불안, 그리고 누구도 말로 하지 못하는 공유된 수치심이라는 감정이다. “일본놈들에 맞서 싸우다가 일본식 목조가옥에서 살고 있는” 삶에 배어있는 감정. sns에서 K적인 것 운운을 몇 년 간 해오다 이젠 지쳐버린 남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어둠과 그것이 야기하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공유된 수치심 안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모두 나쁘다. 괴로움 속에 자조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포기하고 천박해지거나, 외면하고 나는 상관 없다며 기만해버리는 것 정도다. 더 나은 선택은 없을까? 나는 모르겠다. 회개해야 할 거악은 외부에 있고, 여전히 그 영향 아래에 있어 아주 작은 자기부정도 견딜 수 없이 위태롭게 인식하는 국가에서, 약자인 개인은 거듭 부정당하고, 그렇게 축적한 힘으로 외부에 인정받기 위한 지표를 기만적으로 추구하고, 생존이 모든 것의 핑계가 되며 천박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리고, 수치심 자체가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동력으로서 우리를 현재까지 이끌어왔다면, 그것이 우리의 자산이라면 미래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에드워드 양은 이 영화에서 끝까지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의 밝은 낮. 미국에서 온 편지. 라디오에서 호명되는 이름들에서 빛나는 미래.

5. 하나 그리고 하나

분명 제대로 어둠을 보고 있었던 이 감독은 역사라는 짐을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넘겨주지 않을 생각이었던 걸까. 모르겠다. 다만 나는 이전에 여러번 봤던 하나 그리고 둘(2000)을 떠올렸다. 이 영화의 가장 비범한 대사들은 어린아이에게 주어지고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감독이 정말로 어린 사람들을 신뢰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가 배경인 이 영화에는 제대로 살인하는 소년이 등장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이번엔 소년이 아니라 그 옆집 가족들이 주인공이다. 불미스러운 결혼식으로 시작해 평온한 장례식으로 끝나는 줄거리에 인물들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경로를 그려서인지 조화롭게 느껴지는 작품이지만, 사실 세 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노골적인 욕망의 행위자들과 그에 휘말리는 사람들, 알면서도 제 갈 길 사람 등 다양한 현대의 인간군상들이 벌이는 치졸하고 추잡해서 치명적인 사건들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펼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물의 심리와 세계와의 관계를 전달하는 데 풍경을 적절히 활용하여 영화의 표면 자체는 무척 아름답다.(고령가 소년 살인사건도 그렇다.) 덕분에 스크린을 건너 관객이 전달받는 것은 스캔들의 현장이 아니라 피로와 실망, 그래도 남아있는 삶에 대한 기대 같은 것들이다. 우리 모두가 너무 잘 아는 감정들.

무엇보다도 여기서는 가족의 이야기가 좀 다르다. 딸과 아들은 영화 중반까지 아버지의 과거를 재현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들의 삶으로 걸어나간다. 그 사이에 노인은 평온하게 잠들고, 부모 각각의 도피는 실패한다. 나는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보면서 의미를 찾기보단 어쩐지 현실적인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삶은 끔찍하고, 그 끔찍함은 견딜만한 것이라는 안도감.

할머니! 난 모르는게 너무 많아요. 커서 뭘 하고 싶은 줄 아세요? 남이 모르는 일을 알려주고, 못 보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럼 날마다 재밌을 거예요. 할머니가 늘 늙었다고 한 말이 생각나요. 저도 늙어간다고 말하고 싶어요.”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양양의 낭독)

에드워드 양의 영화에 연민은 없지만 희망은 있다. 다른 삶은 모르기 때문에 현재를 솔직하게 진단한다. 아마 이 동네에서 미래가 진정으로 존재하는 곳이 있다면, 바로 이런 현재이긴 할 것 같다. 영화에서 양양이 찍은 우리 각자의 뒷모습 사진 같은, 뒤늦게 떡잎이 올라 온 틴틴의 완두콩 화분같은,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하찮음이 우리가 창조해 낸 천박함을 누르고 진실이 되는 순간. (끝)


중요한 사족

샤오쓰가 평범한 남자애인 데 비해 히로인인 샤오밍은 특별하다. 대상화 된 특수함이 아니라, 그냥 훨씬 더 복잡하고 인간적이고 이해할만한 인물이다. 명시적인 곤경에 처해있고, 생존의 논리 위에서 그녀 앞에 놓인 선택지는 훨씬 명료하다. 그녀는 사회로부터 버려진 인물이지만 사랑에 있어서, 우정에 있어서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는다. 대상이 자신에게 품고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 다만 칼자루를 쥔 쪽이 아닐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