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가장 인간다운 시간 : ‘소공녀’와 ‘레이디 버드’를 같은 날 보았다

“좋지.” 모레 집에서 멀지 않은 극장에서 조조로 영화를 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가볍게 답하고 보니 저녁에 모처럼 영화 약속을 이미 잡은 날이었다. 내가 지난 해 극장에서 본 영화는 총 다섯 편이다. 그런데, 하루에 영화 두 편. 그것도 여성 원탑 주인공인 영화로만. 나는 작은 우연으로부터 의미를 건져올리는 것을 좋아한다. 오전에는 소공녀(전고운, 2017)를, 저녁에는 레이디 버드(그레타 거윅, 2017)를…

[에세이]BIYN의 브랜딩이 내게 알려준 것

조만간 성북동으로 운좋게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폴레옹 제과점에서 성북 초등학교 방향으로 걸어올라가는 넓은 대로는 정말 멋지다. 인도가 없어서 뒤에서 엔진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바짝 벽에 붙는 동네에 살다보니 근래에 성북동에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인도였다. 그 길을 처음 제대로 걸어본 날은 디자인 스튜디오 오늘의 풍경 인아씨와 BIYN(구 ‘기청넷’)의 브랜딩을 위한 킥오프 미팅(겸 나들이)을…

[리뷰] 그리고 그녀는 새처럼 그것을 가볍게 넘었습니다 : 더 포스트 (2017, 스티븐 스필버그)

좋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적고, 권력을 가진 좋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더 적다. 여성이 힘을 얻는 이야기는 대체로 부정의하다. 사회가 그런 방식만을 허락하고 그런 이야기만 선호해왔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지렛대 삼아 통쾌하게 모든 걸 역전시켜버린 영화로 <미스 슬로운>(2016)이 있었던 것 같다. <더 포스트>의 주인공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은 이 점에서부터 이미 예외적인데 가족경영권이 대대로 내려오는…

[비평] 수치심이 동력인 사회가 어떻게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 에드워드 양의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을 보고 하나 그리고 둘(2000)을 회상하며

0. 실체없는 공포 나쁜 것은 모두 어디서 올까? 내가 어릴 때 개구리 소년들이라는 그림자가 교실에 드리워 있었다.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고 했다가 실종된 어린이들.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많았는데도 항상 동갑내기들로, 꼭 이승복 어린이 동상처럼 박제되어 있었다. 개구리 소년들의 교훈은 책으로, 뉴스로, 벽보로, 훈화로 일 년에도 몇 번씩 나를 덮쳤다. 언젠가 자연백과에서 본 독개구리의 무늬가 스산하게…

겨울이 깊어지는 동안

얼마 전부터 이상하게 안 좋은 일들이 연쇄적으로 터져 조금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 동안 힘듦을 처리하는 태도가 변화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익숙한 방식은 숨기고 단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두 해 전부터 그런 방식이 스스로를 조금씩 좀 먹는다는 걸 깨달았다. 일(직장X)을 시작하면서 부터는 자기성찰이 자책감과 잘 구분되지 않는 순간들이 왔고, 잘 견뎌왔다는 긍지의 뒷면에 타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