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실체없는 공포
나쁜 것은 모두 어디서 올까? 내가 어릴 때 개구리 소년들이라는 그림자가 교실에 드리워 있었다.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고 했다가 실종된 어린이들.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많았는데도 항상 동갑내기들로, 꼭 이승복 어린이 동상처럼 박제되어 있었다. 개구리 소년들의 교훈은 책으로, 뉴스로, 벽보로, 훈화로 일 년에도 몇 번씩 나를 덮쳤다. 언젠가 자연백과에서 본 독개구리의 무늬가 스산하게 눈 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왜? 왜? 죄없는 어린이들을 납치하는 무서운 어른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이렇게 두려운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1. 완벽한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1960년대 초에 실제로 사회적 화두가 되었던 대만 최초의 미성년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라고 한다. 영화에는 대만 전후 사회의 총체가 놀랍도록 완벽하게 담겨 있다. 작품의 내적 완결성이 자로 잰 듯 완벽하다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영화라는 양식을 통해 세계를 너무 실제에 근접하게 재현하고 있다. 물론 인공적인 플롯이 있지만 그것이 전개되는 세계는 정말 딱 현실만큼 우연적이고, 부조리하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동행에게 흥분해서 말했다. “영화라는 장르가 세계를 최대한으로 밀도있게 담아낼 수 있는 서사의 크기라는 게 있다면 딱 이 만큼일 것 같아.”
: 한 가족과, 구성원 각자의 도전들. 학교와 그 이면, 병원과 공연장, 국가와 군대, 이웃들이 사는 골목. 몇 번의 살인사건과 두어 개의 삼각관계.
주인공인 샤오쓰가 속한 십대 소년들의 세계는 전후 대만 사회의 속살을 보여주기에는 최적화 된 렌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춘기 아이들은 어른들을 모방하여 조직적으로 힘의 위계를 따른다. 둘째, 게다가 어른들보다 더 적나라하게 폭력을 주고 받는다. 셋째, 아이들은 어른들이라면 말없이 수긍할 부조리한 세상 이치를 납득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래서 이 세계는 영화가 되기에, 사건이 벌어지기에 최적화 된 장이다. 고령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사회 전체의 폭력과 모순이 아이들의 세계로 유입되며 극단적인 사고로 사건화 된 결과다. 주류 사회에서라면 의심과 권력의 기제를 통해 어디로든 적당히 통제되며 계속 굴러갔을 일이, 좁고 밀도높은 이 하위 사회에서는 뚜렷하게 증폭된 것이다. 사건의 트리거가 되는 몇 가지 우연 역시 십대 아이들의 세계라는 특성에 기인한다. 이를 테면 천장 서까래 위를 살펴보는 건, 그래서 2차 대전 때 일본인들이 숨겨둔 칼을 발견하는 건 아이들이기에 하는 짓이다. 관객은 미숙한 세계를 어이없이 바라 볼 뿐이다.
2. 샤오쓰
샤오쓰라는 인물은 이 십대 소년들의 세계를 약간은 주변인적인 위치에 서서 관객에게 보여주다가, 일거에 타인의 목숨을 빼앗음으로서 자신의 세계를 파멸시키고 사회에 경악을 안긴다.
이 남자아이는 얼마 전 갑자기 키가 껑충 크고 말 수를 잃은 모양새로, 긴 러닝타임 내 좀처럼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다. 극 초반에는 갱단 놀음에 심취해 있는 주변 남자애들에 비해 속이 깊은가 싶다가도, 제 생각을 내 비칠 때 보면 그렇지도 않다. 그가 벽장 속에서 일기장에 적는 문구에는 유치한 복수심과 영웅심리가 넘실거린다. 여느 아들들과 같이 자신의 정의를 구현하며 살고 싶다는 욕망을 자연스럽게 갖는 평범한 남자애인 것이다. 그 정의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탱크와 버스가 태연하게 나란히 달리는 세계에서, 일본도와 총탄에 매혹되어버리는 남자아이.
이런 그가 용기를 얻는 대상은 부당한 교사나 가게 주인처럼 소소한 불의에 맞서는 아버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 말하는 소공원파의 전설적 보스 허니, 자신의 미래를 응원하는 가엾고 고결한 여자친구 밍이다. 영화는 이 모든 걸 하나씩 무너뜨리며 진행된다. 아버지는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PTSD에 시달리고, 허니는 상대 갱단의 보스에게 비겁하게 살해당하고, 아픈 모친과 사는 ‘예쁜 여자아이’ 밍은 생존을 위해 차악의 길로 들어선다. 어른의 사정으로 보면 이 불행들을 작동시키는 힘은 너무나 관습적이지만 탐정소설의 주인공조차 아닌 평범한 십대 남자애에게는 이 힘이 작용되는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그에게 이 모든 일은 어둠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연하게도 샤오쓰의 정의구현은 전혀 엉뚱한 과녁을 겨누고 만다.
3. 동아시아의 어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시작부터 어둠과 빛을 장치로서, 메타포로서 아낌없이 사용한다. 예컨대 첫 장면에서 샤오쓰는 성적이 떨어져 학교 주간부에서 야간부로 옮겨가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 있다. 몰락에 대한 적나라한 암시. 1년 후, 학교 근처에 자리한 영화세트장에서 샤오쓰는 랜턴을 훔쳐 나오고, 그것은 시종일관 강한 존재감을 가진다. 영화에서 정말로 중요한 일, 실질적인 일은 어둠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갱단이 굴러가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의 중대사도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공유된다. 어둠의 세계는 빛 앞에서 스스로를 숨기는 데 능숙하다. 죽일 듯 멱살잡이를 하던 아이들도 교사의 눈길이 닿으면 맞춘 듯 놀던 행세를 한다.
나는 이 영화가 어둠을 다루는 방식을 회고하면서, 모국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했던 야심적인 영화들의 면면을 떠올려보았다. 예를 들어 서부극이나 범죄영화의 장르를 빌려서 미국이 폭력 위에 지어진 나라라는 걸 폭로하는 시도들이 있다. 서유럽의 영화들은 계급 착취의 모순과 위선을 드러낸다. 일본 영화들은 개인 안에서 얼마나 어둠이 거대해질 수 있는지 제어장치 없이 탐험해서 나를 질리게 만들곤 한다. 독일 영화에는 기성세대의 완고한 어둠을 바라보다 미쳐버린 청년세대들이 등장한다.
이 거칠게 엮은 서로 다른 사례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둠과 빛이 공모 관계에 있다는 것까지 밝혀낸다 치더라도 적어도 이 둘을 분리시킨다는 점이다. 여기서 어둠과 빛은 서로 지배하고 침범하는 관계다. 하지만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어둠은 이와 다른 차원에 있다. 이 사회에서 어둠은 그냥 기본적으로 모두의 ‘밝은’ 일상에 배태되어 있는 것이다. 샤오쓰의 아버지는 어느 아침 갑자기 공안부 비슷한 곳에 끌려가 알 수 없는 이유(말 그대로 이유가 등장하지 않는다)로 며칠 간의 고초를 겪는다. 가족들은 수심 속에서도 일상을 태연하게 이어나가고 아버지는 어느 밝은 낮 갑자기 돌아온다. 국가의 폭력은 낮에도 횡횡하고 밤의 이야기는 개인들의 몫이다. 즉, 빛이자 암흑의 시작과 끝은 바로 국가다. 갑자기 만들어진 국가에서 당연히 이러한 모순은 가족, 학교, 친지들까지 모든 공동체에 연결되어 있다.
4. 수치스러운 K
건전한 가정, 자랑스러운 국가가 빛이자 어둠인 사회에는 체제에 대한 혁명도, 그로테스크한 사적 관계도, 고발도 없다. 있는 것은 전방위적인 의심과 불안, 그리고 누구도 말로 하지 못하는 공유된 수치심이라는 감정이다. “일본놈들에 맞서 싸우다가 일본식 목조가옥에서 살고 있는” 삶에 배어있는 감정. sns에서 K적인 것 운운을 몇 년 간 해오다 이젠 지쳐버린 남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어둠과 그것이 야기하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공유된 수치심 안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모두 나쁘다. 괴로움 속에 자조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포기하고 천박해지거나, 외면하고 나는 상관 없다며 기만해버리는 것 정도다. 더 나은 선택은 없을까? 나는 모르겠다. 회개해야 할 거악은 외부에 있고, 여전히 그 영향 아래에 있어 아주 작은 자기부정도 견딜 수 없이 위태롭게 인식하는 국가에서, 약자인 개인은 거듭 부정당하고, 그렇게 축적한 힘으로 외부에 인정받기 위한 지표를 기만적으로 추구하고, 생존이 모든 것의 핑계가 되며 천박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리고, 수치심 자체가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동력으로서 우리를 현재까지 이끌어왔다면, 그것이 우리의 자산이라면 미래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에드워드 양은 이 영화에서 끝까지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의 밝은 낮. 미국에서 온 편지. 라디오에서 호명되는 이름들에서 빛나는 미래.
5. 하나 그리고 하나
분명 제대로 어둠을 보고 있었던 이 감독은 역사라는 짐을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넘겨주지 않을 생각이었던 걸까. 모르겠다. 다만 나는 이전에 여러번 봤던 하나 그리고 둘(2000)을 떠올렸다. 이 영화의 가장 비범한 대사들은 어린아이에게 주어지고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감독이 정말로 어린 사람들을 신뢰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가 배경인 이 영화에는 제대로 살인하는 소년이 등장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이번엔 소년이 아니라 그 옆집 가족들이 주인공이다. 불미스러운 결혼식으로 시작해 평온한 장례식으로 끝나는 줄거리에 인물들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경로를 그려서인지 조화롭게 느껴지는 작품이지만, 사실 세 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노골적인 욕망의 행위자들과 그에 휘말리는 사람들, 알면서도 제 갈 길 사람 등 다양한 현대의 인간군상들이 벌이는 치졸하고 추잡해서 치명적인 사건들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펼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물의 심리와 세계와의 관계를 전달하는 데 풍경을 적절히 활용하여 영화의 표면 자체는 무척 아름답다.(고령가 소년 살인사건도 그렇다.) 덕분에 스크린을 건너 관객이 전달받는 것은 스캔들의 현장이 아니라 피로와 실망, 그래도 남아있는 삶에 대한 기대 같은 것들이다. 우리 모두가 너무 잘 아는 감정들.
무엇보다도 여기서는 가족의 이야기가 좀 다르다. 딸과 아들은 영화 중반까지 아버지의 과거를 재현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들의 삶으로 걸어나간다. 그 사이에 노인은 평온하게 잠들고, 부모 각각의 도피는 실패한다. 나는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보면서 의미를 찾기보단 어쩐지 현실적인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삶은 끔찍하고, 그 끔찍함은 견딜만한 것이라는 안도감.
“할머니! 난 모르는게 너무 많아요. 커서 뭘 하고 싶은 줄 아세요? 남이 모르는 일을 알려주고, 못 보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럼 날마다 재밌을 거예요. 할머니가 늘 늙었다고 한 말이 생각나요. 저도 늙어간다고 말하고 싶어요.”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양양의 낭독)
에드워드 양의 영화에 연민은 없지만 희망은 있다. 다른 삶은 모르기 때문에 현재를 솔직하게 진단한다. 아마 이 동네에서 미래가 진정으로 존재하는 곳이 있다면, 바로 이런 현재이긴 할 것 같다. 영화에서 양양이 찍은 우리 각자의 뒷모습 사진 같은, 뒤늦게 떡잎이 올라 온 틴틴의 완두콩 화분같은,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하찮음이 우리가 창조해 낸 천박함을 누르고 진실이 되는 순간. (끝)
중요한 사족
샤오쓰가 평범한 남자애인 데 비해 히로인인 샤오밍은 특별하다. 대상화 된 특수함이 아니라, 그냥 훨씬 더 복잡하고 인간적이고 이해할만한 인물이다. 명시적인 곤경에 처해있고, 생존의 논리 위에서 그녀 앞에 놓인 선택지는 훨씬 명료하다. 그녀는 사회로부터 버려진 인물이지만 사랑에 있어서, 우정에 있어서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는다. 대상이 자신에게 품고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 다만 칼자루를 쥔 쪽이 아닐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