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기후위기에 맞서는 정치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

비례민주주의연대의 [ ]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 공개간담회의 발제문입니다. 왜 어떤 문제는 끝내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지, 모두가 첫 번째로 중요하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대다수가 세 번째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가 정치에 반영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정리해보았어요.

9월 21일 토요일 한국에서도 시민들의 기후위기 비상행동이 진행됩니다. 내가,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하는 일들이 속속들이 준비되고 있으니 함께해요. (2019.9.6 덧붙임)


어떤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생존과 연결된 문제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문제를 알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자 노력해왔다. 과학적 절차를 걸쳐 문제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졌고, 문제해결을 위한 신뢰할 수 있는 실행목표도 도출되었다. 그러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실행을 하면 된다. 그런데 어쩐지 수십 년 째 도통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문제의 초점을 문제 해결의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 정치 자체에, 키를 쥔 채로 움직이지 않는 이들에게, 그들에게 계속 키가 쥐어지는 상황에 맞춰봐야 하지 않을까. 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이야기다.

상식이 된 문제, 기후변화

기후변화는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있는 보편적인 상식이 되었다. 지구온난화는 학교 교과서에 실리는 주제고,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는 수치들은 나날이 더 어두운 방향으로 업데이트 되고있다. 최근 전문가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속도가 당초의 모델로 예측했던 것 보다 두 배가량 빨라질 수 있다는 어두운 전망을 발표했다. 지구온난화와 짝을 이루어 진행 되는 해양산성화 또한 산호초를 비롯한 석회생물들의 생존을 위협하며 바닷 속 생태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해양산성도는 26%가 증가했고, 이는 산업혁명 이전 5,500만 년 동안보다 10배 빠른 속도이다.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목도하고 있을 수 없는 위험들이 70년대 이후부터 수십년 째 이야기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로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이에 대응하는 사회의 변화는 명징하지 않다.

기후변화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일반 교양상식이 되어가는 사이 실제 우리의 일상도 기후변화에 위협당하기 시작했다. 이제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문제적 상황을 호소하기 위해 조그만 얼음조각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북극곰의 사진이나, 바닷 속 회잿빛으로 변해버린 산호초 군락까지 떠올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유럽에서는 올해 기록적인 폭염이 연일 갱신되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져 온다. 프랑스는 45도, 인접한 서유럽 국가들도 40도를 상회하는 날씨가 이어지는 중이다. 미국은 수년 째 허리케인과 캘리포니아 대형 화재 등 기후재난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에 가장 먼저 노출되고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인프라가 약한 가난한 지역에 거주하거나 야외에서의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유엔 인권이사회에서는 기후변화가 부유한 사람들은 문제를 회피할 수 있지만 나머지 가난한 사람들이 위기를 감당하게 되는 ‘기후 차별’ 시나리오로 현실화 될 수 있다며 대응을 촉구하기도 했다.

정도와 양상은 다르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일상의 변화는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대기 정체로 인해 누적된 고농도 미세먼지는 일상이 되었고, 뉴스에서 말하는 장마는 어쩐지 아열대 기후에서 볼 수 있다는 ‘스콜’과 더 유사해진 것 같다. 지난 해 여름에는 온 국민이 기록적인 폭염을 경험했다. 당장 이 글을 쓰고있는 지금도 “긴급재난문자”가 핸드폰을 울린다. “서울,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남 지역 폭염경보, 야외활동 자제, 충분한 물마시기 등 건강 유의 바랍니다.”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면 실내는 안전한가. 글이야 에어컨이 설치된 공간에서 쓸 수 있지만, 에어컨이 없는 곳에 사는 사람, 야외에서 일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최근 발행되고 있는 한국일보의 기획연재 “한 여름의 연쇄살인, 폭염”에서는 국내 온열질환 피해사례를 적극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예상가능하지만 피해자들은 대체로 열악한 주거지역에 사는 노인, 야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질병관리본부의 피해현황 집계 및 감시시스템은 병원의 자체적인 신고에만 의존하고 있어 피해상황을 축소 인지되는 것일 뿐, 기후변화는 이미 오늘의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사안이다.

온실가스배출 감축,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

기후변화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달성목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안에 온실가스배출을 넷제로(net-zero)에 도달하도록 줄이는 것이다. 넷제로란 기후에 미치는 영향이 0이 되는 수준까지 탄소배출을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 5월 1일 영국의회는 기후변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며 2050년까지 탄소배출 넷제로를 달성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계획은 6개월 이내로 제출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런 결단이 이뤄진 배경에는 “멸종저항”이라는 시민들의 급진적인 직접행동이 있다. 또 한편으로 영국은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에너지 전환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온 나라이기도 하다. 2025년 영국의 모든 석탄화력발전소는 문을 닫을 예정이다. 자동차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 중 하나인 독일은 2030년부터 화석연료에 기반한 자동차의 생산 판매를 금지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바라보면 상당히 급진적으로 보이는 이런 결정들이 진행되고 있는 건 당연히 그럴만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 기후변화협약을 위한 근거가 되는 평가자료를 생산하는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는 지난 해 마련한 특별보고서에서 온난화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지구기온상승을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1.5도 이내로 제한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탄소배출량을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최소 45% 감축하고, 2050년까지 넷제로 배출을 달성해야 한다. 지난 보고서에서 2.0도였던 수치가 1.5도로 조정된 까닭은 0.5도 차이로 최악의 사태를 상당부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99%의 산호가 소멸되는 것을 70~90% 소멸로 완화할 수 있고, 영구동토층이 녹아 발생하게 되는 메탄가스를 방지할 수 있다. 만약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특정 온도 이상으로 넘어가면 인간이 배출하는 온실가스와 별개로 지구가 스스로 온실가스배출을 가속화하는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정말로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IPCC 보고서는 가장 확실한 과학적 근거들만을 담은 보수적인 결과물로 이는 과장이 아니다.

한국은 93년 기후변화 협약에 가입했지만, 기후변화대응에 있어서는 연일 낙제점을 받고 있다. 2019년 국가별기후변화대응지수에서는 60개국 중 57위에 머물렀고, 2016년에는 기후변화 대응에 게으른 국가들에게 부여되는 ‘기후 악당’ 국가로 선정된 전례도 있다.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전세계적인 에너지원 생산추이를 보면 70년대 이후 일정한 흐름을 보이다가 석탄 에너지, 원자력 에너지가 점차 줄어들고 천연가스와 재생에너지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도 그렇게 하면 된다. 한국은 온실가스배출량 중 에너지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80%를 넘는 수준이기 때문에 에너지 전환이 온실가스배출 감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지난해 “2030 국가 온실가스감축 기본로드맵”을 수정 발표하는 과정에서는 항목만 변경되었을 뿐 이전 안에 비해서 배출량이 실질적으로 줄어들지 않았고, 실질적으로 감축해야 할 산업분야 에너지 분야의 로드맵은 회피한 채 산림흡수를 주요 방안으로 제출했다. 올해 발표한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안”에서도 뾰족한 목표는 드러나지 않았다. 에너지 소비량을 줄이겠다고 했으나 비중이 가장 높은 산업 부문 에너지는 건드리지 않았고,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도 2040년 30~35%라는 보수적인 목표에 그쳤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다.

복잡하고, 불확실하고, 장기적인 문제를 풀어나가는 정치

올 여름을 앞두고 정부는 전기요금 인하를 폭염 대책으로 제시했다. 더우니까, 에어컨을 좀 더 킬 수 있게 하자. 아주 단순한 문제인식과 해결책이다. 그리고 이 해결책은 결과적으로 기후위기를 심화시킨다. 에너지 전환은 결국 전기세 인상을 통한 전력수요관리를 통해 이뤄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기후위기 국면에서 완전히 역행하는 관점을 보여준 셈이다. 미세먼지 추경예산에서도 (온실가스배출과 중복되는) 미세먼지 배출원을 규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정책 대신 마스크, 공기청정기 보급과 개인들이 운행하는 노후경유차 조기 폐차 지원 등 단기적인 안들을 주로 담았다.

이대로는 가까운 미래에 큰 위기에 처할 게 뻔한데, 왜 근본적인 예방과 변화를 피하고 해법 아닌 단순한 해법에만 머무르는 것일까? 표심을 해치기 싫은 마음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기후위기에 맞서는 정치는 시민의 안전과 생존을 보장하는 강력한 규제정치를 동반해야만 한다. 그런데 산업경제와 에너지를 둘러싼 이해관계는 명확한 반면 시민의 안전과 생존은 손상을 입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사회적 약자인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공론장에 잘 반영되기 어렵다. 결국 모두를 위한 규제정책은 아무에게도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기득권에게 더 유리하게 세팅되어 있는 한국 선거법 상, 주류 보수정당들에게는 규제정책으로 괜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 보다는 단기적인 생색내기용 처방이 ‘정치적’으로 더 안전한 선택이다. 물론 이런 논리는 이 상황을 전혀 합리화하지 못한다.

한편, 지난 7월 22일 보도된 세계일보의 기후변화 인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기후변화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의견이 85.2%로 나타났다.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보편적 공감대가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실업, 경제성장 등 다른 과제들과 함께 1년 안에 해결해야 할 과제의 우선순위를 묻자 경제성장이 1위를 차지하고 기후변화는 최하위에 놓였다. 응답자들은 10년 안에 해결할 과제를 물을 때에야 기후변화가 경제성장, 저출산 고령화에 이어 세 번째로 중요한 의제라고 답했다. 기후변화는 여전히 ‘미래의제’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2020년을 앞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는 이런 ‘선호도’를 승패의 전략에 반영하는 포퓰리즘 정치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눈 앞의 생존논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대한 85%의 인식이 없는 것으로 치부되지 않고 득표로, 당선으로 이어지게끔 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강화하는 것이 그 방향이 될 수 있다. 작금의 선거제도는 지역구 투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후보로 등장한 인물 개인과 조직화 된 이익집단 중심의 이해관계가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런 제도 하에서는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제가 특정 이해관계자 그룹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슈에 비해 오히려 표를 얻지 못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정책과 가치는 선거에 도움이 안된다는 판단 하에 계속 뒷전으로 밀려나기 십상이고, 유권자들은 정책과 가치에 투표를 하고 싶어도 사표심리 때문에 주저하게 된다.기후위기와 같은 아젠다를 다루기 위한 공공성의 정치가 가능하려면 승자 독식이 아니라 다당제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높은 비례성의 선거제도 도입이 필요하다. 적어도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준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비례대표제는 정치 권력의 다양성을 강화하는 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후변화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변수를 다수 포함한 문제다.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다루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필수적인 역량이다. 이를 테면 기후변화에 진지하게 대응하는 과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만나게 된다. 인구수는 늘어가는데 식생의 변화로 농업이 위기가 처하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탄소기반의 에너지 다소비 산업구조를 어떻게 전환할 것인지. 산업구조의 전환 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어떻게 적대적인 국가들이 힘을 합쳐 2050 온실가스배출 넷제로 달성이라는 목표에 함께 도달할 수 있을지. 양당제 정치 체제 하에서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사회적 토론을 입체적으로 해나가기 어렵다.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사회적 토론을 축적시켜 나갈 수 있는 정치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청소년의 투표권이 보장되고 청년 정치인들의 정치 진입 장벽이 낮아져야 한다. 과거의 해법만으로 풀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는 산업화 이후 인류가 화석연료에 기반한 경제구조와 생활양식을 발전시켜 오면서 생겨난 문제이다. 우리가 성취로 여겨온 것들이 빚으로 돌아온 셈이다. 경로의존성에서 벗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기후위기 활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정확히 그런 관점으로 질문을 던져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16세인 그는 기후변화를 가르치면서 변화를 위해 실천하지는 않는 성인들을 향해 미래가 없다면 왜 학교에 가야하는 지를 반문하며, 매 주 금요일 학교에 가는 대신 국회 앞에서 기후위기 대응 행동을 촉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라는 이름의 이 사회운동은 이제 전 세계 청소년들의 직접행동으로 확장됐다. 장기적인 문제를 풀고 싶다면 미래세대를 현재의 주권자로 대우해야 한다. 지금 그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되어야 미래를 바꿀 수 있다.

2020 총선을 기후위기 해결 선거로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고요한 것입니까? ‘개인의 작은 실천’만 습관처럼 되뇌일 뿐, 기후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회구조 개혁에는 왜 나서지 않습니까? 정부와 국회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녹색당 기후위기 비상사태 선언문)

지난 7월 29일 원외정당인 녹색당은 기후위기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정부와 국회의 침묵이 이 사회의 침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소리로 정치를 바꿔낼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IPCC 1.5도 특별보고서가 감축목표를 제시한 2030년이 10년 남았다. 기후위기를 염려하는 시민들의 의지가 의석으로 연결될 수 있는 선거법 하에서 내년 총선을 치르지 않으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타이밍을 놓치게 될 지도 모른다. 선거법이 극적으로 패스트트랙에 상정 되었지만 국회 정개특위를 둘러 싼 뉴스를 보면 갈 길은 쉽지 않아보인다. 누군가에게는 선거제도 개혁이 각 정당들의 이권다툼을 둘러싼 문제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기후위기에 맞서는 정치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선거제도 개혁은 미래를 지켜내기 위한 문제다. 2020 총선을 기후위기 해결의 시발점으로 기억하게 될 미래 없이는 다른 미래도 없다. 선거제도 개혁의 키를 쥐고 있는 여·야당은 늦지 않게 선거개혁을 성사해야만 한다.

[에세이] 쉼과 일, 제자리에 돌려놓기

“되게 바보 같은데, 사랑받는 기분이다? 클라이언트들한테 좋은 반응을 얻거나 무서운 윗사람한테 칭찬을 들으면, 프로답지 않게 갑자기 눈물이 글썽 고여. 나는 사랑도 꽤 받고 컸는데 왜 하필 그런 순간들에서 충족감을 느낄까? 미쳤나봐. 고장났나봐.”

정세랑 <보늬> (단편집, <옥상에서 만나요> 중)

“언니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정세랑 작가의 단편소설 <보늬>는 과로사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주인공 보윤은 인터넷에서 언니처럼 야근하다 돌연사한 사람들의 사례를 모으던 중, 생전의 언니가 했던 말을 떠올립니다. 위의 인용구는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하냐는 보윤의 질문에 대한 언니의 대답입니다. 보윤은 그런 충족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말하지만, 저는 솔직히 그 고장난 것 같은 마음이 무언지 알 것도 같았어요. 어려운 도전에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 두려움의 대상으로부터 인정받았을 때 드는 안도감, 동료에 대한 미안함이나 고마움 같은 감정들.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감정들로 만들어지는 마음의 상태가요. 

“일을 그냥 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비단 마음의 문제일까요? 실제로 일은 언제나 일 이상의 것입니다. 일은 나의 생계를 책임지는 생명줄이고, 성장의 과정이자, 소중한 관계이며, 때로는 나의 신분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특히 금융기관 앞에서 적나라해지더군요.) 이런 식으로 일이 삶의 대부분을 치환해나가다 보면 일을 제외한 삶의 다른 부분이 ‘나머지’인 것 같은 착시마저 듭니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정책도 한 몫 한 것 같아요. 한국의 사회보험 정책이나 주거 정책, 금융지원정책을 들여다보면 세상에는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만 있고 그 외의 구성원들은 ‘나머지’인 것만 같거든요. 온 사회가 착시에 빠져있다면, 내가 제대로 보고있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어요. 

소설에서 보윤은 언니와 같이 일로 충족감을 주고받는 사람들만 있어도 세상은 유지될 것이고, “나 같은 사람은 부품으로 치면 핵심부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보윤이듯, 세상은 나머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만 지난 세기를 이끌어 온 핵심논리가 나머지를 계약의 중심에 두지 않았을 뿐이죠. 지난 뉴스레터에 이어 다시 한 번, 우리에게는 새로운 계약이 필요합니다. ‘나머지’라는 공간을 애시당초 만들지 않는 형식의 계약이요. 

이런 맥락에서 요즘 정책위원회가 고민하고 있는 키워드는 ‘쉼’입니다. 쉼은 학습이고, 돌봄이자,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관계이며, 회복의 시간입니다. 배움과 회복, 돌봄 없이 일하고 성장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점에서, 쉼이야말로 모두에게 핵심적인 부분이고 그냥 쉼이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쉼은 남는 시간, 노는 시간으로 퉁쳐지지요. 소설가 어슐러 르 귄이 말년에 쓴 블로그 포스트들을 엮은 책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는 이런 모순에 대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르 귄은 고령의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한 하버드 대학교의 설문조사에 답변하던 중 이해할 수 없는 항목을 발견합니다. 여가시간에 무슨 일을 하는지 묻는 질문에 골프, 쇼핑 등등에 이어 창의적 활동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죠. 평생 작가로 살아 온 그는 자신의 ‘일’이 ‘여가’로 취급당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다가 이내 여가 시간이라는 구분에 대해 의문을 품습니다. 

“나는 아직도 남는 시간이 뭔지 잘 모르겠다. 내 시간은 전부 할 일로 바쁘기 때문이다. 항상 그래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시간은 삶에 점령되어 있다.”

어슐러 르 귄,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같은 글에서 르 귄은 오늘날 십대들이 여가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부디 그들에게 틈이 있어 자신의 내면 깊이 빠져들어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어쩐지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미래가 없는데 왜 학교에 가야하는 지 묻는 전세계의 청소년 기후위기 활동가들이 떠올랐어요.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좌절감 이전에 꿈을 꿀 수 조차 없는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들. 기후위기 시대, 책임있는 정치집단이라면 지난 세기의 청사진을 꿈으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 미래세대가 내용을 채워넣을 수 있는 꿈의 공간을 확보해주는 정치를 해야할 것입니다.

그건 틀림없이 지금까지 핵심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던 가치들과 대립하는 듯 보이는 규제의 정치일 수 밖에 없겠죠. 선거국면에서 녹색당이 제시해야 할 새로운 사회계약의 미션은 일과 경제성장, 삶의 질 사이의 끈끈한 연결고리를 끊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규제의 논리가 개인들의 삶에 있어서는 안전을 보장하고 자유를 확보하는 일과 한 쌍이라는 비전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기가 녹색당의 기본소득이 재위치화 될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말이네요. 모두 바쁘고 충만한 쉼의 시간 보내시기를 바라며, 
긴 편지를 읽으며 떠오르신 생각들이 있다면 아래 버튼을 눌러 정책위원회에게 전해주세요. 🌱

고맙습니다.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백희원 드림. 


7월 부터 녹색당에서 정책 뉴스레터 발행을 시작했어요. 두 번째 뉴스레터의 글을 작성했습니다. 격주 금요일에 발행되는 레터에는 녹색당 정책위원회의 현재진행형 고민과 자문위원 및 위원들의 뉴스 큐레이션이 함께 나갑니다. 구독하기 뉴스레터보기

눈부신 평등의 삶은 어떤 모양일까?

어제 녹색당 신지예 서울시장 예비후보의 선거캠프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에 다녀왔습니다. 캠프의 기본소득 공약에 대한 정책 토크 ‘서울, 기본소득, 시작’이 있었거든요. 정책안의 요지는 ‘재산세’(토지, 건축물, 주택, 항공, 선박 등에 부여되는 지방세)의 표준세율을 올리고 이 돈으로 월 10만원의 청년 기본소득을 실행한다는 것입니다. 토지에 기반한 공유재 시민배당 같은 인상을 주는 정책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재산이 있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추가로 걷어 그 돈을 보편적인 기본소득으로 흘려보내는 것이니까, 저는 토크를 하러 가는 길에서부터 ‘불평등’과 ‘재분배’라는 이슈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의외로, 기본소득 활동가로서 저는 이 이슈에 대해서 모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간에는 일단 기본소득의 제도적 실현가능성을 넘어 이 아이디어의 필연성에 공감할 수 있게끔 ‘상상력’을 강조하는 방식의 운동을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또 ‘기본소득’을 오직 사회정의를 위한 도구로만 설명하는 말하기 방식에 대한 저항감이 있었던 탓도 있겠습니다. BIYN은 언제나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더 강조해왔거든요. 재분배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는 함부로 사회를 주체로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책안으로 이 이슈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저에게 정말로 뜻 깊은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불평등이 줄어든 사회의 삶이란 구체적으로 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거듭 기본소득이 모두에게 동등한(동일함 아님 주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만 이야기해왔는데, (너무 당연한 말이라 동어반복 같지만) 이는 당연히 기회의 상대적 격차가 줄어든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즉, 모두의 권한이 늘어나면서 누군가의 특권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특권이 줄어든 세계의 삶은 대체 무엇일까요? 저는 현재 특권을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 조차 이 사회에서 특권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품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집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내 자식도 언젠가는 좋은 대학에 들어갈텐데’ 뭐 이런 기대들이 있는 것일까요? 아무튼 여기서 기인한 두려움이 우리가 합리적으로 평등을 실현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 같고요.

어제 토크에 함께 참여한 이주영 녹색당 강남구청장 예비후보는 한국 계급 피라미드의 상당히 위에 있는 ‘강남키드’들에게도 탈력감은 예외가 아니라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부모세대와 같은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목도하는 데서 오는 ‘무기력감’이 있다고요. (자기연민의 감정이나 ‘우리도 힘들어’가 아니라 솔직한 사실의 기술이었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일단 저는 평등에 대한 한 가지 감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평등한 사회에서 우리는 잃을 것도 없고, 모자란 것도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을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모두에게 온전한 자신을 허락함으로서 각자 알아서 (즉, 타인을 착취하지 않고) 위대해질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주겠지요? 여기서 공교육 이슈에 대한 고민으로 넘어가기 전에 정책 토크는 끝이 났습니다. 저에게는 질문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어서 이렇게 미완성의 생각이나마 글로 남겨봅니다.

신지예 예비후보의 메인 슬로건은 “눈부신 평등의 서울로”입니다. 서울만큼 평등이 어울리지 않는 도시가 있을까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울이 전세계 기본소득 실험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다면 그때의 가설은 대도시에서 소득격차가 줄고 자산취득에 대한 유인이 줄어든다면 사람들의 삶의 질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습니다. 예컨대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의 주제가 노동이고, 캐나다 실험이 빈곤과 심리적 안정으로 요약된다면 한국 서울의 기본소득 실험의 주제는 불평등이 되는 셈이죠. 기대가 됩니다. 청년배당, 청년수당과 같은 현금지급정책을 넘어 이 사회의 가장 주요한 인센티브 시스템을 건드릴 기본소득 정책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