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녹색당 신지예 서울시장 예비후보의 선거캠프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에 다녀왔습니다. 캠프의 기본소득 공약에 대한 정책 토크 ‘서울, 기본소득, 시작’이 있었거든요. 정책안의 요지는 ‘재산세’(토지, 건축물, 주택, 항공, 선박 등에 부여되는 지방세)의 표준세율을 올리고 이 돈으로 월 10만원의 청년 기본소득을 실행한다는 것입니다. 토지에 기반한 공유재 시민배당 같은 인상을 주는 정책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재산이 있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추가로 걷어 그 돈을 보편적인 기본소득으로 흘려보내는 것이니까, 저는 토크를 하러 가는 길에서부터 ‘불평등’과 ‘재분배’라는 이슈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의외로, 기본소득 활동가로서 저는 이 이슈에 대해서 모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간에는 일단 기본소득의 제도적 실현가능성을 넘어 이 아이디어의 필연성에 공감할 수 있게끔 ‘상상력’을 강조하는 방식의 운동을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또 ‘기본소득’을 오직 사회정의를 위한 도구로만 설명하는 말하기 방식에 대한 저항감이 있었던 탓도 있겠습니다. BIYN은 언제나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더 강조해왔거든요. 재분배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는 함부로 사회를 주체로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책안으로 이 이슈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저에게 정말로 뜻 깊은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불평등이 줄어든 사회의 삶이란 구체적으로 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거듭 기본소득이 모두에게 동등한(동일함 아님 주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만 이야기해왔는데, (너무 당연한 말이라 동어반복 같지만) 이는 당연히 기회의 상대적 격차가 줄어든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즉, 모두의 권한이 늘어나면서 누군가의 특권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특권이 줄어든 세계의 삶은 대체 무엇일까요? 저는 현재 특권을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 조차 이 사회에서 특권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품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집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내 자식도 언젠가는 좋은 대학에 들어갈텐데’ 뭐 이런 기대들이 있는 것일까요? 아무튼 여기서 기인한 두려움이 우리가 합리적으로 평등을 실현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 같고요.
어제 토크에 함께 참여한 이주영 녹색당 강남구청장 예비후보는 한국 계급 피라미드의 상당히 위에 있는 ‘강남키드’들에게도 탈력감은 예외가 아니라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부모세대와 같은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목도하는 데서 오는 ‘무기력감’이 있다고요. (자기연민의 감정이나 ‘우리도 힘들어’가 아니라 솔직한 사실의 기술이었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일단 저는 평등에 대한 한 가지 감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평등한 사회에서 우리는 잃을 것도 없고, 모자란 것도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을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모두에게 온전한 자신을 허락함으로서 각자 알아서 (즉, 타인을 착취하지 않고) 위대해질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주겠지요? 여기서 공교육 이슈에 대한 고민으로 넘어가기 전에 정책 토크는 끝이 났습니다. 저에게는 질문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어서 이렇게 미완성의 생각이나마 글로 남겨봅니다.
신지예 예비후보의 메인 슬로건은 “눈부신 평등의 서울로”입니다. 서울만큼 평등이 어울리지 않는 도시가 있을까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울이 전세계 기본소득 실험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다면 그때의 가설은 “대도시에서 소득격차가 줄고 자산취득에 대한 유인이 줄어든다면 사람들의 삶의 질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습니다. 예컨대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의 주제가 노동이고, 캐나다 실험이 빈곤과 심리적 안정으로 요약된다면 한국 서울의 기본소득 실험의 주제는 불평등이 되는 셈이죠. 기대가 됩니다. 청년배당, 청년수당과 같은 현금지급정책을 넘어 이 사회의 가장 주요한 인센티브 시스템을 건드릴 기본소득 정책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