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역사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때

: 로마(2018, 알폰소 쿠아론) @상상마당

모리님께.

일주일만에 첫 편지를 보냅니다.[1]

그날, 집에 돌아와 함께사는 친구에게 오늘 극장에서 되게 오랜만에 졸았다고 말했더니 가볍게 웃고나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근데 극장에서 자는 거 은근히 기분좋지 않아? 어렴풋한 빛에 깨잖아. 되게 기분좋게 일어나져.” 맞아 정말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아마도 “어렴풋한 빛”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것인지, 그 순간 마음 속에 그날 본 영화가 마치 선잠에 들어 꾼 꿈처럼 희미하게 떠오르더니 사라졌어요. 귓가엔 어린 시절 저녁께쯤 되면 들리던 두부 파는 아저씨의 종소리가 초여름의 날벌레 소리와 함께 웅웅 맴돌았고요. 그건 참 오랜만에 보는 내면의 풍경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영화라는 게 종종 심상을 남기기도 하는 거였지.’ 어떤 멋진 장면의 인상이나 줄거리나 인물이 기억에 새겨지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원래 있었던 느낌들을 일깨웠던 영화들을 모처럼 떠올렸어요. [2]


‘로마’는 롱테이크가 자주 나오는 흑백 영화였지만 명상적이기보다 너무나 구체적으로 감각을 자극하는 영화였던 것 같아요. 아니, 어쩌면 이건 정말로 명상적인 특징일지도 모르겠네요 감각에 집중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래서 잠이 솔솔 왔던걸까…(조조를 보기 전 날에는 일찍 자는 걸로.) 아무튼 우리가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잠시 이야기 나누었듯이 상징으로 가득한 영화였는데요. 너무 상징적인 작품들은 종종 관객을 조금 머쓱하게 하잖아요. 삶에 대한 무거운 의미부여가 호들갑스럽게 느껴진달까. 저는 그렇더라고요. 사실 그래서 감독의 전작인 ‘그래비티’를 보면서는 조금 힘들었거든요. 이야기의 배경으로서의 우주는 그 자체로 일종의 메타포가 되어버리기도 하니까. 로마에서 상징들이 지나가는 경험은 그와는 달랐습니다. 역사 속의 로마도, 이탈리아의 로마도 아닌, 멕시코의 로마를 배경으로, 상징들은 생활의 시공간 속에 촘촘히 스며들어 있었고, 아주 유려한 시청각적 경험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잘 재현된 보편은 개별적인 경험들을 소환합니다. 그래서였던 것 같아요. 그날 저녁,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6.25 전쟁 이야기를 물었던 적이 있는데, 대답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유 그때 정신 없었지, 뭐. 그런 느낌으로. 그저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네요. 카스테라를 좋아하고 매일 매일 노인대학에서 배운 가곡을 복도까지 들리도록 크게 불러서 엄마를 민망하게 했던 우리 집의 할머니가 일제시대도, 6.25 전쟁도, 유신정권도 지나온 사람이라는 것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도 그런 시대들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없었어요.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는 할머니의 것이었죠. 어렸을 때 공부를 더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돈 벌라고 안시켜줬다는 이야기 같은 것. 하지만 무의식중에 일본어 동요를 흥얼거리다가 짜증을 내는 건지 웃는 건지 헷갈리는 말투로 아이고 이건 까먹지도 않는다고 말할 때, 제게는 ‘역사’라고 할만한 것이 갑자기 할머니의 얼굴을 하고, 할머니의 목소리로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는 했습니다. 할머니가 나보다 어렸을 때 할머니는 쇼죠지의 너구리에 대한 동요를 불렀구나.

할머니에게 시대를 평가하는 역사적 관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듯,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할머니는 기억해야 할, 드러나는 존재는 아니었겠죠. 실제로 우리 할머니와 같은 사람들을 부르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어요. 이를테면 할머니는 ‘국제시장’의 등장인물도, ‘응답하라 시리즈’의 등장인물도 아니거든요. 시골에서 상경해 식모살이를 하거나 공장에 다니지도 않았고, 결혼해서 주부가 되지도 않았어요. 간호사로 보건소에서 일하면서 홀로 엄마를 낳아 모녀가정을 꾸리셨죠. 그 시대의 역사는 전문직 여성도, 비혼모도 바라보지 않았고요. 부끄럽게도 멕시코의 사정을 잘 모르지만, 로마의 주요 인물들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네모난 집은 역사적 스펙터클에서 비껴서 있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더욱 부각되는, 이 영화의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은 클레오가 우연히 페르민과 만나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 뒤 양수가 터지는 때였는데, 제게는 그 순간이 역사와 클레오가 서로를 알아보는 사건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재현의 예술로서 영화는 옛날 일에 대해서 이런 만남을 주선할 수 있네요. 감탄했지만 클레오의 상황은 너무 가혹했고, 우리들에겐 불행한 일을 겪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남성 감독을 의심할 권리가 충분히 있지 않은가요? 저는 곱씹었어요. 이 영화의 사랑을. 그건 차별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는 분명 아닌 것 같았습니다. 착취와 돌봄과 구분되지 않은 채로 인물들의 삶을 보호하는 무언가였어요. 긍정할 수 없지만 부인해서는 안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지난 사정.

여기까지 글을 적고 나니 어떤 보편적인 질문들이 제게 떠오릅니다 : 산다는 일에서 살아남는 일의 비중은 얼만큼일까요? 살아남는 일은 사랑하는 일을 얼마나 일그러뜨릴까요? 아니, 사랑은 어떤 일그러짐 속에서 가능한 것 일까요? 나는 (어쩌면 우리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꼭 근사하지만은 않은 사랑을 한 결과 지금 살아있는 것이구나. 이 발견에 대해 어떤 감정도 들지 않는데요, 다만 흑백의 하늘처럼 애매한 질문들이 한 동안 답 없이 떠다닐 것습니다. 상징은 심상으로 다가와서 결국 질문이 되었네요. 모리님께는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천천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19년 1월,

희원 드림.


[1] 이 글은 이모리님과 함께 월 1회 함께 영화를 보고 글을 쓰기로 해써 쓰여진 글이다. 회신은 백 편의 에세이에서 읽을 수 있다. 영화는 두 편을 보았고, 글은 꼭 한 번 오갔다. 가끔 모리님이 준 단풍모양 향을 피운다. 종이 향을 맡고 싶을 때.

[2] 페드로 코스타의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 아녜스 바르다의 ‘다게레오타입’. 테렌스 데이비스의 ‘먼 목소리, 조용한 삶’.

[리뷰]가장 인간다운 시간 : ‘소공녀’와 ‘레이디 버드’를 같은 날 보았다

“좋지.” 모레 집에서 멀지 않은 극장에서 조조로 영화를 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가볍게 답하고 보니 저녁에 모처럼 영화 약속을 이미 잡은 날이었다. 내가 지난 해 극장에서 본 영화는 총 다섯 편이다. 그런데, 하루에 영화 두 편. 그것도 여성 원탑 주인공인 영화로만.

나는 작은 우연으로부터 의미를 건져올리는 것을 좋아한다. 오전에는 소공녀(전고운, 2017)를, 저녁에는 레이디 버드(그레타 거윅, 2017)를 연달아보게 되니 두 영화가 같은 카테고리로 묶일 것 같았다. 방황하던 현대 여성이 자신의 자리를 찾는 여성 성장물 아닐까. 극장에 두 차례 들어갔다 나와 보니 완전히 틀린 예측이었다. 우선 두 영화는 아주 달랐고,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반성을 딛고 성장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리뷰] 그리고 그녀는 새처럼 그것을 가볍게 넘었습니다 : 더 포스트 (2017, 스티븐 스필버그)

좋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적고, 권력을 가진 좋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더 적다. 여성이 힘을 얻는 이야기는 대체로 부정의하다. 사회가 그런 방식만을 허락하고 그런 이야기만 선호해왔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지렛대 삼아 통쾌하게 모든 걸 역전시켜버린 영화로 <미스 슬로운>(2016)이 있었던 것 같다. <더 포스트>의 주인공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은 이 점에서부터 이미 예외적인데 가족경영권이 대대로 내려오는 워싱턴 포스트지의 CEO이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정통성을 물려받은 여성이다. 물론 여기에는 우여곡절이 있다. 원래 후계자였던 남편이 자살하여 그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더 포스트>는 권력을 가졌지만 그걸 사용할 입을 가지지 못한 캐서린이 미국이라는 세계를 바꿔놓을 한 마디를 해내는 사람이 되는 이야기다. 스필버그는 자기 세대의 가장 극적이고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건(결국 워터게이트 폭로로 이어진다)의 주인공으로 여성을 비추고, 잃어버릴 것, 지킬 것이 있는 여성이 모든 걸 걸고 대의를 추구할 때 그 용기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 숭고함을 전한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에 대해서, 외계생명을 사랑하는 아이에 대해서 그러했듯이.

남자들의 세계에서 경영위기에 맞서 회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더 큰 가치를 위해 큰 결정을 내리는 그녀에게 힘을 주는 것은 그녀의 가족, 충언을 아끼지 않는 남성, 그리고 결국에는 그녀 자신이다. 워싱턴 포스트를 자유를 수호하는 ‘언론’으로서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 이 사회적 신념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분리되지 않고, 나는 이 점이 싫지 않았다. 우리들은 이런 식으로 강하기도 하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좀 더 솔직하고, 우리를 응원한다. 우리가 현명하면서도 사랑과 다정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 우리의 덕목이며 역량이다. 자기 좆이 가장 중요한 사람은 절대로 못해낼 일이다.

당연하지만 너무 스필버그 영화라 그가 페미니즘에 재능기부를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비꼼 아님) 그는 만약 자신이 지금까지 발휘해 온 장기, 그러니까, 우정과 용기의 덕목을 배우들에 담아내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의 리듬을 부여하는 것(서류를 폭탄처럼 찍는다), 존 윌리엄스의 음악을 풍성하게 활용하는 것을 다른 대상을 다른 각도로 비추는 데 사용한다면 얼마나 더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지 알았다. 이건 남성 캐릭터들을 보면 알 수있다. 이 영화의 정의로운 남자들은 전에 없이 어딘가 허영기가 있다. 그들은 자신이 정의의 수호자로 역사에 남기를 기대한다. 편집장 벤(톰 행크스)이 부인 토니(사라 폴슨)와 대화하는 장면은 이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같은 여성으로서 토니는 캐서린 그레이엄이 오로지 잃을 것 뿐인 결정을 용기있게 해냈고, 그것이 벤의 경쟁심리와 공명심보다 숭고한 것임을 우아하고도 명확하게 지적한다.

퍽 아름다운 영화이기도 했다. 미국의 자유를 수호한 어떤 기여도 빼먹지 않으려는 그 속도와 이동의 기술이 근사했다. 이렇게 이동하며 모두 담아낸다

: 전쟁의 현장과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결심한 내부고발자의 눈동자, 함께 자료를 만드는 운동조직, (거짓을 전하는 장관의 입), 주식 시장 상장을 논의하는 캐서린과 프리츠 사이의 신뢰와 애정, 백악관과의 적대적인 관계를 알리는 전화벨 소리, 캐서린과 편집장 사이의 격의없는 긴장관계.

: 기사를 쏘는 파이프, 활자를 짜맞추는 사람들, 이야기를 배달하고 전하는 사람들, 신문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기계, 산업 안의 사람, 산업을 유지하는 국가, (그 무엇과도 관련없이 고립된 모습으로, 우스운 그림자로 등장하는 백악관의 닐슨), 국가를 수호하는 헌법, 헌법의 주권자인 국민, 여성을 응원하며 끝없이 늘어선 여성들. 그들이 보내는 눈빛들 속을 걸어나가는 캐서린 그레이엄. (끝)

어쨌든 그녀는 그런 시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시험을 치르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녀에게 경고와 충고의 고함을 지르는 주교, 사제장, 박사, 교수, 가장, 교육자들을 보았고, 그녀가 그들을 보지 않았기를 바랐지요. 당신은 이런 일을 할 능력이 없고, 저런 일은 해서는 안 됩니다! 대학 연구원과 학자 들만이 잔디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인들은 소개장 없이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열망을 품은 우아한 여류 소설가들은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처럼 그들은 경마장의 울타리에 몰려든 관중들처럼 그녀에게 계속 소리 질렀고, 그녀가 치를 시험은 오른쪽이나 왼쪽을 돌아보지 않고 울타리를 넘는 것이었지요. 만약 당신이 욕설을 퍼붓기 위해 멈춰 선다면 당신은 파멸이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지요. 비웃기 위해 멈추어도 마찬가지라고 말입니다. 망설이거나 더듬거린다면 당신은 끝장이다. 오로지 뛰어넘는 것만을 생각하라. 나는 그녀의 등에 내 온 재산을 건 것처럼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새처럼 그것을 가볍게 넘었습니다.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민음사, 이미애 역 쏜살문고 판 138p)


P.s. – 영화를 볼 기회는 친구가 만들어준 것이었다. 내 옆에 앉아있는 이 여성 친구가 어떤 기분인지 생생하게 느끼며 함께 볼 수 있어 참 좋았다.

[비평] 수치심이 동력인 사회가 어떻게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 에드워드 양의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을 보고 하나 그리고 둘(2000)을 회상하며

0. 실체없는 공포

나쁜 것은 모두 어디서 올까? 내가 어릴 때 개구리 소년들이라는 그림자가 교실에 드리워 있었다.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고 했다가 실종된 어린이들.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많았는데도 항상 동갑내기들로, 꼭 이승복 어린이 동상처럼 박제되어 있었다. 개구리 소년들의 교훈은 책으로, 뉴스로, 벽보로, 훈화로 일 년에도 몇 번씩 나를 덮쳤다. 언젠가 자연백과에서 본 독개구리의 무늬가 스산하게 눈 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왜? 왜? 죄없는 어린이들을 납치하는 무서운 어른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이렇게 두려운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1. 완벽한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1960년대 초에 실제로 사회적 화두가 되었던 대만 최초의 미성년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라고 한다. 영화에는 대만 전후 사회의 총체가 놀랍도록 완벽하게 담겨 있다. 작품의 내적 완결성이 자로 잰 듯 완벽하다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영화라는 양식을 통해 세계를 너무 실제에 근접하게 재현하고 있다. 물론 인공적인 플롯이 있지만 그것이 전개되는 세계는 정말 딱 현실만큼 우연적이고, 부조리하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동행에게 흥분해서 말했다. “영화라는 장르가 세계를 최대한으로 밀도있게 담아낼 수 있는 서사의 크기라는 게 있다면 딱 이 만큼일 것 같아.”

: 한 가족과, 구성원 각자의 도전들. 학교와 그 이면, 병원과 공연장, 국가와 군대, 이웃들이 사는 골목. 몇 번의 살인사건과 두어 개의 삼각관계.

주인공인 샤오쓰가 속한 십대 소년들의 세계는 전후 대만 사회의 속살을 보여주기에는 최적화 된 렌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춘기 아이들은 어른들을 모방하여 조직적으로 힘의 위계를 따른다. 둘째, 게다가 어른들보다 더 적나라하게 폭력을 주고 받는다. 셋째, 아이들은 어른들이라면 말없이 수긍할 부조리한 세상 이치를 납득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래서 이 세계는 영화가 되기에, 사건이 벌어지기에 최적화 된 장이다. 고령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사회 전체의 폭력과 모순이 아이들의 세계로 유입되며 극단적인 사고로 사건화 된 결과다. 주류 사회에서라면 의심과 권력의 기제를 통해 어디로든 적당히 통제되며 계속 굴러갔을 일이, 좁고 밀도높은 이 하위 사회에서는 뚜렷하게 증폭된 것이다. 사건의 트리거가 되는 몇 가지 우연 역시 십대 아이들의 세계라는 특성에 기인한다. 이를 테면 천장 서까래 위를 살펴보는 건, 그래서 2차 대전 때 일본인들이 숨겨둔 칼을 발견하는 건 아이들이기에 하는 짓이다. 관객은 미숙한 세계를 어이없이 바라 볼 뿐이다.

2. 샤오쓰

샤오쓰라는 인물은 이 십대 소년들의 세계를 약간은 주변인적인 위치에 서서 관객에게 보여주다가, 일거에 타인의 목숨을 빼앗음으로서 자신의 세계를 파멸시키고 사회에 경악을 안긴다.

이 남자아이는 얼마 전 갑자기 키가 껑충 크고 말 수를 잃은 모양새로, 긴 러닝타임 내 좀처럼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다. 극 초반에는 갱단 놀음에 심취해 있는 주변 남자애들에 비해 속이 깊은가 싶다가도, 제 생각을 내 비칠 때 보면 그렇지도 않다. 그가 벽장 속에서 일기장에 적는 문구에는 유치한 복수심과 영웅심리가 넘실거린다. 여느 아들들과 같이 자신의 정의를 구현하며 살고 싶다는 욕망을 자연스럽게 갖는 평범한 남자애인 것이다. 그 정의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탱크와 버스가 태연하게 나란히 달리는 세계에서, 일본도와 총탄에 매혹되어버리는 남자아이.

이런 그가 용기를 얻는 대상은 부당한 교사나 가게 주인처럼 소소한 불의에 맞서는 아버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 말하는 소공원파의 전설적 보스 허니, 자신의 미래를 응원하는 가엾고 고결한 여자친구 밍이다. 영화는 이 모든 걸 하나씩 무너뜨리며 진행된다. 아버지는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PTSD에 시달리고, 허니는 상대 갱단의 보스에게 비겁하게 살해당하고, 아픈 모친과 사는 ‘예쁜 여자아이’ 밍은 생존을 위해 차악의 길로 들어선다. 어른의 사정으로 보면 이 불행들을 작동시키는 힘은 너무나 관습적이지만 탐정소설의 주인공조차 아닌 평범한 십대 남자애에게는 이 힘이 작용되는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그에게 이 모든 일은 어둠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연하게도 샤오쓰의 정의구현은 전혀 엉뚱한 과녁을 겨누고 만다.

3. 동아시아의 어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시작부터 어둠과 빛을 장치로서, 메타포로서 아낌없이 사용한다. 예컨대 첫 장면에서 샤오쓰는 성적이 떨어져 학교 주간부에서 야간부로 옮겨가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 있다. 몰락에 대한 적나라한 암시. 1년 후, 학교 근처에 자리한 영화세트장에서 샤오쓰는 랜턴을 훔쳐 나오고, 그것은 시종일관 강한 존재감을 가진다. 영화에서 정말로 중요한 일, 실질적인 일은 어둠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갱단이 굴러가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의 중대사도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공유된다. 어둠의 세계는 빛 앞에서 스스로를 숨기는 데 능숙하다. 죽일 듯 멱살잡이를 하던 아이들도 교사의 눈길이 닿으면 맞춘 듯 놀던 행세를 한다.

나는 이 영화가 어둠을 다루는 방식을 회고하면서, 모국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했던 야심적인 영화들의 면면을 떠올려보았다. 예를 들어 서부극이나 범죄영화의 장르를 빌려서 미국이 폭력 위에 지어진 나라라는 걸 폭로하는 시도들이 있다. 서유럽의 영화들은 계급 착취의 모순과 위선을 드러낸다. 일본 영화들은 개인 안에서 얼마나 어둠이 거대해질 수 있는지 제어장치 없이 탐험해서 나를 질리게 만들곤 한다. 독일 영화에는 기성세대의 완고한 어둠을 바라보다 미쳐버린 청년세대들이 등장한다.

이 거칠게 엮은 서로 다른 사례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둠과 빛이 공모 관계에 있다는 것까지 밝혀낸다 치더라도 적어도 이 둘을 분리시킨다는 점이다. 여기서 어둠과 빛은 서로 지배하고 침범하는 관계다. 하지만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어둠은 이와 다른 차원에 있다. 이 사회에서 어둠은 그냥 기본적으로 모두의 ‘밝은’ 일상에 배태되어 있는 것이다. 샤오쓰의 아버지는 어느 아침 갑자기 공안부 비슷한 곳에 끌려가 알 수 없는 이유(말 그대로 이유가 등장하지 않는다)로 며칠 간의 고초를 겪는다. 가족들은 수심 속에서도 일상을 태연하게 이어나가고 아버지는 어느 밝은 낮 갑자기 돌아온다. 국가의 폭력은 낮에도 횡횡하고 밤의 이야기는 개인들의 몫이다. 즉, 빛이자 암흑의 시작과 끝은 바로 국가다. 갑자기 만들어진 국가에서 당연히 이러한 모순은 가족, 학교, 친지들까지 모든 공동체에 연결되어 있다.

4. 수치스러운 K

건전한 가정, 자랑스러운 국가가 빛이자 어둠인 사회에는 체제에 대한 혁명도, 그로테스크한 사적 관계도, 고발도 없다. 있는 것은 전방위적인 의심과 불안, 그리고 누구도 말로 하지 못하는 공유된 수치심이라는 감정이다. “일본놈들에 맞서 싸우다가 일본식 목조가옥에서 살고 있는” 삶에 배어있는 감정. sns에서 K적인 것 운운을 몇 년 간 해오다 이젠 지쳐버린 남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어둠과 그것이 야기하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공유된 수치심 안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모두 나쁘다. 괴로움 속에 자조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포기하고 천박해지거나, 외면하고 나는 상관 없다며 기만해버리는 것 정도다. 더 나은 선택은 없을까? 나는 모르겠다. 회개해야 할 거악은 외부에 있고, 여전히 그 영향 아래에 있어 아주 작은 자기부정도 견딜 수 없이 위태롭게 인식하는 국가에서, 약자인 개인은 거듭 부정당하고, 그렇게 축적한 힘으로 외부에 인정받기 위한 지표를 기만적으로 추구하고, 생존이 모든 것의 핑계가 되며 천박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리고, 수치심 자체가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동력으로서 우리를 현재까지 이끌어왔다면, 그것이 우리의 자산이라면 미래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에드워드 양은 이 영화에서 끝까지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의 밝은 낮. 미국에서 온 편지. 라디오에서 호명되는 이름들에서 빛나는 미래.

5. 하나 그리고 하나

분명 제대로 어둠을 보고 있었던 이 감독은 역사라는 짐을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넘겨주지 않을 생각이었던 걸까. 모르겠다. 다만 나는 이전에 여러번 봤던 하나 그리고 둘(2000)을 떠올렸다. 이 영화의 가장 비범한 대사들은 어린아이에게 주어지고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감독이 정말로 어린 사람들을 신뢰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가 배경인 이 영화에는 제대로 살인하는 소년이 등장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이번엔 소년이 아니라 그 옆집 가족들이 주인공이다. 불미스러운 결혼식으로 시작해 평온한 장례식으로 끝나는 줄거리에 인물들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경로를 그려서인지 조화롭게 느껴지는 작품이지만, 사실 세 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노골적인 욕망의 행위자들과 그에 휘말리는 사람들, 알면서도 제 갈 길 사람 등 다양한 현대의 인간군상들이 벌이는 치졸하고 추잡해서 치명적인 사건들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펼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물의 심리와 세계와의 관계를 전달하는 데 풍경을 적절히 활용하여 영화의 표면 자체는 무척 아름답다.(고령가 소년 살인사건도 그렇다.) 덕분에 스크린을 건너 관객이 전달받는 것은 스캔들의 현장이 아니라 피로와 실망, 그래도 남아있는 삶에 대한 기대 같은 것들이다. 우리 모두가 너무 잘 아는 감정들.

무엇보다도 여기서는 가족의 이야기가 좀 다르다. 딸과 아들은 영화 중반까지 아버지의 과거를 재현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들의 삶으로 걸어나간다. 그 사이에 노인은 평온하게 잠들고, 부모 각각의 도피는 실패한다. 나는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보면서 의미를 찾기보단 어쩐지 현실적인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삶은 끔찍하고, 그 끔찍함은 견딜만한 것이라는 안도감.

할머니! 난 모르는게 너무 많아요. 커서 뭘 하고 싶은 줄 아세요? 남이 모르는 일을 알려주고, 못 보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럼 날마다 재밌을 거예요. 할머니가 늘 늙었다고 한 말이 생각나요. 저도 늙어간다고 말하고 싶어요.”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양양의 낭독)

에드워드 양의 영화에 연민은 없지만 희망은 있다. 다른 삶은 모르기 때문에 현재를 솔직하게 진단한다. 아마 이 동네에서 미래가 진정으로 존재하는 곳이 있다면, 바로 이런 현재이긴 할 것 같다. 영화에서 양양이 찍은 우리 각자의 뒷모습 사진 같은, 뒤늦게 떡잎이 올라 온 틴틴의 완두콩 화분같은,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하찮음이 우리가 창조해 낸 천박함을 누르고 진실이 되는 순간. (끝)


중요한 사족

샤오쓰가 평범한 남자애인 데 비해 히로인인 샤오밍은 특별하다. 대상화 된 특수함이 아니라, 그냥 훨씬 더 복잡하고 인간적이고 이해할만한 인물이다. 명시적인 곤경에 처해있고, 생존의 논리 위에서 그녀 앞에 놓인 선택지는 훨씬 명료하다. 그녀는 사회로부터 버려진 인물이지만 사랑에 있어서, 우정에 있어서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는다. 대상이 자신에게 품고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 다만 칼자루를 쥔 쪽이 아닐 뿐.

[리뷰] 성장은 아이의 몫 : 영화 4등(정지우, 2016)

사랑니 (2005), 은교(2012) 등 금기시 된 사랑을 소재로 삼아왔던 정지우 감독의 신작 4등(2016)은 수영을 소재로 한국의 교육현실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언뜻 뜬금없이 느껴지지만 막상 영화를 들여다보면 날카로운 논란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벼려 들이미는 솜씨가 예의 그것이다.

수영을 “놀려고” 시작한 초등학생 준호(유재상)는 소질은 있지만 나가는 대회마다 4등이다. 메달만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는 등수에 속이 뒤집어지는 엄마 정애(이항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끝에 메달 따게 해준다는 코치 광수(박해준)를 소개받고, 광수의 진심어린 지도 덕에 준호는 “거의 1등”에 가까운 2등 메달을 딴다. 그러나 이 진심어린 지도의 실체는 다름 아닌 체벌이다. 진실을 마주한 부모는 갈등한다.

<4등>은 준호의 몸에 멍이 들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광수란 인물에 공을 들인다. 그가 준호를 체벌하는 까닭은 십 수 년 전 유망주였다가 체벌에 반발해 성공가도에서 엇나간 자신의 과거를 진심으로 후회하기 때문이다. 정애는 “준호가 맞는 것보다 4등하는 게 더 무서운” 불안감에 이를 눈 감아 준다. 관객은 이 불안이 메달만 따면 그만인 한국의 성과 중심 선수 양성 시스템에서 비롯함을 광수의 과거 에피소드와 현실에 비추어 알 수 있다. 다행히 아빠 영훈(최무성)이 나서서 상황을 제재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과거 광수를 낙오시킨 체벌 시스템의 적극적인 방관자이다. 이 영화 속 도식을 복기하다 보면 도입부 삽입 된 98년 박세리 선수의 LPGA 우승 보도 화면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1등에게만 환호하며 4등을 몰아붙인 것은 수많은 국민영웅을 소비해 온 이 나라다.

하지만 이는 다 어른들의 사정일 뿐, 주인공 준호는 복잡한 갈등을 배경으로 유유히 영화를 가로질러 나아간다. 그 과정 내내 관객은 준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결정하고 행동하는 준호를 볼 수 있다. 준호는 심드렁한 코치에게 용기 있게 자신의 수영을 봐달라고 요구하고, 체벌의 위협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마침내 어른들의 이야기가 실패로 끝났을 때에야 혼자 수영장으로 돌아와 최선을 다해 자신의 경기를 치른다. 준호를 따라가는 이 영화의 마지막 10분은 아름다우며 숏 마다 명확한 의미로 충만하다.

이처럼 준호의 결정에 극의 진행을 맡기면서도 그 당위를 설명하는 데 무관심한 태도에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담겨 있다. 성장은 아이의 몫이며 그 원동력도 아이 내면에 기인한다. 그리고 아이가 자신의 욕망을 직면하고 세계로 달려 나갈 때 어른을 우선 이해시켜야 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