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곁눈질의 스토리텔링 : 웹툰 ‘구름의 이동속도’ (김이랑)

가끔 그냥 사는 게 기적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밥벌이 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것, 일상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이 있다는 것, 내 한 몸 쉴 수 있는 작은 방이 있다는 것, 가끔은 스스로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줄 수 있다는 것. 누구에게나 주어진 수준의 삶 같고 때로는 벗어나고 싶은 생활이지만,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던 어린 시절의 마음을 떠올려 보면 지금 평범한 어른으로 살고있는 것이 새삼 놀랍다. ‘내가 어느새 여기까지 왔을까?’

구름의 이동속도

주간 연재로 총 65화. 개성있는 네 명의 십대 인물들의 두 학기를 따라가는 웹툰 <구름의 이동속도>(김이랑)를 읽다 보면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비슷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아이들이 언제 이렇게 성장했지?’ 이 물음표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걸 봤을 때의 놀라움이라기보다는 너무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버렸을 때의 자각에 가까운 것이다. 어느 틈에 다음 계절의 바람이 훌쩍 불어왔을 때의 기분좋은 당혹감 같은 것.

이런 자연스러움은 <구름의 이동속도>가 지닌 여러 미덕들의 원천인 동시에 총합이다. 나는 이 작품이 웹툰이라는 장르가 구현할 수 있는 리얼리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생활툰의 디테일함과도 다르고, 속도감있는 스토리텔링으로 독자를 작품에 몰입시키는 개연성에 기인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김이랑 작가는 그저 대다수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 그러니까, 무사히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의 첫 한 걸음을 우연과 필연의 비율을 맞춰 정교하게 현실적으로 재현한다. 이 글에서는 이 성취가 어떤 서사와 형식을 통해 얻어지는지, 또 이로 인해 추가되는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지 짚어보고자 한다.

어긋남의 개연성

좋은 드라마라면 입체적인 인물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네 명의 주요 인물들에게도 제각기 복잡한 사정이 있다. 주인공 상완은 입원 중인 아버지와 바쁜 엄마 대신 아래로 줄줄이 딸린 동생 셋을 돌봐야 하는 녹록지 않은 환경 속에서 ‘명문대 진학, 대기업 입사, 자산가’라는 명확한 꿈을 키워나가는 성적우수 모범생이다. 그런데 운이 어찌나 없는지 집에 불까지 나서 이제는 엄마가 운영하는 노래방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한다. 겉으로는 냉정하고 효율만 따지는 듯 보이지만 요령이 없을 뿐 실은 마음 약한 구석이 많다. 이런 상완의 사정은 알지 못한 채 그를 짝사랑하는 해준은 늘 나사 하나 빠진 듯 태평해보이지만 사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단짝 친구 유나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방황 중이다. 해준의 소꿉친구인 재규는 장난기 넘치고 친구들도 잘 챙기는 인기인이지만 집에서는 늘 형에 비교당하는 못난 동생 신세다. 상완의 관심을 끄는 상급생 연주는 뭐든지 잘하는 영재다. 약점이라고는 없어보이지만 사실 어른스럽고 무심한 표정 아래 담임 교사였던 서준쌤에 대한 애정과 배신감을 숨기고 있다. 마지막으로 목소리는 주어지지 않지만 반에서 겉돌던 나리가 허물없는 해준과 친해지면서 조용히 함께 성장한다.

이 이야기는 이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사진부에 느슨하게 모여들면서 이어진다.

성장물 <구름의 이동속도>는 첫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도, 꿈을 이루는 이야기도, 땀 흘려 승리를 쟁취하는 이야기도, 가면을 벗고 진정한 나 자신으로 재탄생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 작품은 그냥 주인공들이 비로소 삶을 진전시킬 힘을 얻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물론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는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남다른 지점은 여기있다.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곁눈질하며 나아가는 이야기랄까.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분명 작품의 시작과 끝을 담당하는 상완이지만, 그 홀로 중심에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네 명의 인물들 각자의 사정을 배경으로 돌림노래처럼 이야기가 켜켜이 쌓이는 전개방식을 택하고 있다. 선형적인 기승전결 대신 작은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는 동안 인물들은 어느새 성장한다.

물론 여러 인물들이 각각의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구조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도, 시트콤에서도, 소설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다. <구름의 이동속도>의 개성을 좀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 보기에 비슷한 시기에 같은 플랫폼에서 연재된 성장물 <야채호빵의 봄방학>(박수봉)과의 비교가 용이할 것 같다. 이 작품 역시 야채라는 온화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천천히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이 두 작품이 인물들을 연결짓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왕따와 학대 수준의 사교육이라는 현안을 담고 있는 <야채호빵의 봄방학>에서는 왕따의 피해자였거나 방관자였던 인물들이 어렵사리 진심을 털어놓고 마침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한다. 즉, 여기서는 인물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구름의 이동속도>로 돌아오자면, 아이들은 상완을 중심으로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친구가 되지만,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야채호빵의 봄방학>에서는 서로가 함께 해가는 과정 자체가 사건화되어 있다면 <구름의 이동속도>도 첫 상당부분을 인물들이 사진부로 모여드는 과정에 할애하기는 하지만 사건은 그냥 사건이고 인물들이 계속 마주치게 하는 장치일 뿐이다. 하지만 이해 없이도 구원과 성장은 일어난다. 예컨대 상완은 만사에 의욕 없는 해준을 움직이는 동인이지만, 이를 계기 삼아 마침내 앞으로 내달리는 일은 해준의 결정이지 상완의 구원이 아니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인물들을 이끄는 건 오히려 오해와 어긋남들이다.

어긋남의 연속을 통해 개연성을 직조하는 기술은 <구름이 이동속도>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십분 발휘된다. 있는 힘껏 견디고 있는 사람의 감정은 곧잘 엉뚱한 곳에서 터지기 마련이다. 힘든 환경 속에서 한 학기의 노래방 거주 생활을 견뎌온 상완은 사람 좋은 소리만 하는 아버지에게 느끼는 답답함을 쌓아두었다가 속상함을 털어놓는 해준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고만다. 해준의 사정을 잘 아는 재규는 타인의 어려움을 무시하는 상완에게 화를 내고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기지만, 종국에는 상완이 특유의 솔직함으로 재규에게 작은 해방감을 주며 갈등을 해소하는 예기치 못한 결과로 이어진다.

막상 상완이 해준을 마주보고 자신의 말에 대해 사과를 건네는 건 한참 시간이 지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의 일이다. 아버지에게 전하지 못한 마음이 함께 담겨있는 이 뒤늦은 사과에 해준은 용서의 말로 답하는 대신 내내 자신이 회피해왔던 고백의 말을 건넨다. “좋아해.” 어쩌면 이 말을 꺼내는 해준에게 상완의 대답은 안중에 없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 순간은 해준이 죽은 유나에 대한 죄책감을 넘어 비로소 자신의 삶을 직면하는 순간이다. 화면에 단촐하게 떠있는 말풍선을 보며 독자는 이 이야기가 결국 이 한 마디의 힘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성장물 <구름의 이동속도>는 트라우마나 약점을 뛰어넘으며 성장으로 직진하는 플롯이 아니라 이렇게 딴청을 피우며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사진부에 모인 연주, 해준, 상완, 재규, 나리는 함께 놀러 가거나 학교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축제를 위한 전시를 준비하기도 한다. 인물들의 변화는 그 과정에서 한 번씩 이야기에 방점을 찍을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스릴러나 공포물에 가까운 에피소드들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느긋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각자의 세계와 개인의 내면을 다루는 법

이는 독자에게는 편안하지만 구현하기 쉬운 이야기 전개방식은 아니다. 명확한 인과관계로 이루어진 ‘떡밥 회수’가 아니라 왠지 모르게 납득이 되는 우연과 이야기들의 연속을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지만 저 인물이라면 저렇게 행동했을 법도 하다는 느낌을 전해야 하는데, 독자에게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으면 자칫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구름의 이동속도>는 이를 만화다운 능숙함으로 풀어낸다. 만화는 작가의 선택권이 폭넓은 서사 장르다. 소설이나 논픽션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텍스트의 체계 밖을 벗어날 수 없고, 영화는 영상으로 최대한 세계를 재현하며,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은 이러니 저러니해도 실제의 움직임을 모방하며 흘러간다. 하지만 만화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동시에 쓸 수 있고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시간과 공간을 단절시키며 세계를 생략하고 필요에 따라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어 과장할 수 있다. <구름의 이동속도>는 네 사람의 목소리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방식을 택하는데(때로는 선생님과 같은 관찰자의 목소리가 짧게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소설이라면 설명이 많이 필요하고, 영화라면 이질적으로 느껴졌을 장치다. 하지만 만화에서는, 특히 스크롤 웹툰에서는 인물의 얼굴과 말투만으로 자연스럽게 전환이 된다. 이는 독자가 자연스럽게 인물들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경로가 된다.

또한 이 작품은 배경으로 현실에서 포착한 공간들을 사용한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학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시내, 익숙한 연립주택과 아파트, 평범하기 짝이 없는 노래방 공간 등. 심지어 해수욕장 같은 비일상의 공간도 소주병이 곳곳에 늘어서 있는 한국의 그 해변이 등장하는데, 이는 이 이야기가 주요 인물들만으로 이루어진 작은 사회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실제로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것 같은 열린 공간감을 제공하는 효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렇게 충분히 복잡하고 넓은 현실 세계가 배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인물들 사이에도 어느 정도 거리감이 허용된다.

해준과 재규, 상완의 사이가 아무리 친해져도 이들은 각자 다른 맥락, 다른 세계 속에 속해있다. 재규의 세계가 게임과 사교육의 세계라면 상완의 세계는 TV프로그램과 병원, 그리고 입시의 세계다. 해준의 경우, 유나의 빈 자리와 엄마의 무관심 사이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지 못한 채 의미 없는 일상을 무탈히 보내고 있을 뿐이다. 말풍선과 인물들의 내레이션은 주로 이 간극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예가 한 화의 마지막에서 함께 벌인 일들을 지나 각자가 혼자가 되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을 삽입하는 것이다. 이 형식은 일종의 마침표로 작품 내내 여러 번 반복된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이 작품은 인물들 사이의 간극을 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물들 사이에 충분히 거리가 있기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스스로 변화의 계기를 찾게 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구름의 이동속도>에서는 해준이 충동적으로 상완의 사진을 찍는 순간부터 시작해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사건은 언제나 인물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이는 매개로, 적절한 생략과 기호들, 인물들의 설명을 사용해 빠르게 전개된다. 독자가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작가가 공을 들이는 부분은 인물의 감정이 표출되는 순간들이다. 작품의 많은 부분을 인물들의 목소리에 기대고 있음에도, 본심이 드러나는 결정적인 순간은 그림으로 표현된다. 마음을 ‘만화적으로’ 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순간들은 언뜻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 풀린 신발끈에서 유나를 떠올리는 해준의 옆모습이나, 바닷가에서 실눈을 뜨고 순간의 평화를 즐기는 상완의 얼굴, 서준쌤을 올려다보는 연주의 눈빛 묘사는 탁월하게 정확하다. 실제 인물의 연기나 사진을 통해서 포착할 수 있을 것 같은 감정의 미묘함이 작가 특유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그림체를 통해 전달되는 순간들은 퍽 감동적이다.

평범한 가난

편안한 그림체와 담담한 유머감각 때문에 잘 티가 나지 않지만 사실 <구름의 이동속도>의 에피소드들은 죽음, 방화, 사제 간의 사랑과 같은 무척 자극적인 소재들로 이루어져 있다. 부당한 학칙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학괴 에피소드는 스릴러에 가깝다. 이 작품이 이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에 갖는 미덕은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놓인 인물들도 평범하게 느껴지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상완이 그렇다. 방화범이 집에 불을 질러서 노래방에 숙식하는 남학생이라니. 신문 사회면에서 맞닥뜨렸다면 도대체 어떤 심정일지 가늠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상완의 본심은 작품 속에서 종종 악몽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하는데, KBS2의 <안녕하세요>를 참조한 듯한 버라이어티 쇼의 구경거리가 되어 시청자들에게 값싼 동정심을 사는 꿈은 그가 처한 취약한 상황을 불현듯 냉정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그런 시청자들이 아니라 상완에게 보편의 목소리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상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화가 나있을지언정 자신을 약자나 동정의 대상으로 타자화하지 않는다. 제 사정을 알 길 없는 친구들이 돈을 더 쓰게 만들었을 때도 친구들에게만 화살을 돌리지 않고 한 푼 두 푼 계산해보고 있는 자신의 찌질함을 돌아본다. 자존심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상완의 행동이 올바르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정상적’ 환경에 놓인 상완에게서 드러나는 억울함이나 냉소, 후회와 자격지심 같은 감정들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야기의 초반부, 재규가 자신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상완에게 의문을 품을 때 독자가 자연스럽게 마음을 이입하게 되는 쪽은 상완이다. 상완이 불쌍해서 이해해주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럴만 하다’고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주변화 된 인물들에게 보편의 목소리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오늘날의 서사물들이 의식해야 할 윤리적 책임이다.

이는 비단 상완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미성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환경에 휘둘릴 수 밖에 없다. <구름의 이동속도>는 외부 환경에 의해 주체성을 상실한 이 십대들에게, 그 중에서도 목표가 있는 사람보다는 목표가 없는 사람에게, 상실과 애도 밖에 있는 사람보다는 그 안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에게, 그러니까 대개의 경우 할 만한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그들 자신의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는 지점까지 기다려준다. 그런데 비전을 갖기는커녕 무엇의 뚜렷한 안티테제조차 되지 못한 채 막연히 방황하는 시간들은 사실 한국사회의 누구나 겪는 시간이다. 심지어 평생을 그렇게만 살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직접 보고 경험했기에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느린 성장서사는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다.

희미하지만 명확한 희망

<구름의 이동속도>가 그리는 사회는 어둡다. 아이들은 이기적이고,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집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가장 친한 친구는 어느 날 늘 오가던 건널목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세상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세상은 관심이 없고, 이런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더 나쁜 점은 그래도 이 세상의 일상은 평화롭게 계속 이어져 간다는 것이다. 유나가 죽어도,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삶은 계속된다. 불행히도 이는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를 희미하지만 명확한 희망까지 데려간다. <구름의 이동속도>에는 나쁜 일들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반복되어 밀려오는 세상에서, 구름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삶은 변화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명확한 인과관계가 아니라 부작용의 부작용들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현실만큼이나 개연성이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고 그 자연스러움이 이 희망을 신뢰할 수 있게끔 한다. 언젠가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될지 모른다. 그건 생활을 정리하고 사진가의 꿈을 시작하는 서준쌤처럼 큰 변화일 수도, 언젠가 해준을 만나러 독일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상완처럼 작은 변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곁에 있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 복잡한 세상에서 어떤 우연들이 우리의 삶에 변화의 계기로 찾아올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계기를 만났을 때, 변화를 선택하는 것은 바로 내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 우리는 언젠가 건널목을 건널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구름의 이동속도>가 오늘의 우리에게 긴 시간을 들여 선사하는 메시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