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내가 좋아하는 계절은

기억 없는 존재들

서늘한 눈과

뛰어노는 다람쥐들 (코요)

이 하이쿠를 나는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롤랑 바르트 저, 변광배 역, 민음사)라는 책에서 마주쳤다. 그 뒤로 가끔 정신이 산란하고 피로할 때 적어보거나 소리 내어 외어보고는 한다. 사계절이라기보다는 두 계절과 두 간절기에 가까워져 버린 한국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좋아하는 계절은 무난하게 봄과 가을이지만, 여름은 여름 나름대로 겨울은 겨울 나름대로 좋은 순간들이 있다. 이 하이쿠는 나에게 겨울의 가장 좋은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빠른 속도로 걸을 때의 가쁜 숨 속에 섞여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 살을 에고 뼈를 시리게 하는 추위는 싫지만, 속이 시원하고 정신이 맑아지는 차가운 들숨만은 좋다. 이 촉각적 심상에서 나는 그림자의 윤곽을 쨍하게 가다듬는 겨울의 하얀 볕과 검은 밤하늘까지 함께 떠올리게 된다. 공기가 잠잠하던 어느 초겨울 저녁, 낙하하지 않고 눈앞을 아주 천천히 가로지르던 작은 눈송이도. 그러면 어쩐지 타인들의 스케쥴과 얽혀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제 자리를 디뎌보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취향의 의미

나는 어느 반에나 한 명씩 꼭 있고 인터넷에는 바글바글한, 유난스레 만화책을 읽고 유난스레 음악을 듣는 애로 십대를 보낸 뒤 자연히 유난스레 영화를 보는 대학생이 되었다. 각종 명작 괴작, 화제작들을 섭렵하는 타입은 아니었고, 내가 좋아할만한 것을 찾아 반복해 감상하는 편이었다. 그러다보니 관련 커뮤니티에는 속하지 않고 영화나 음악에 유난스럽게 굴지 않는 지인들과 어울리면서 오히려 대단한 전문가(혹은 ‘덕후’나 ‘허세’) 취급을 받는 역설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잘 모르는 이들로부터 나중에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무척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들에 한 번도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확실히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정확히 알 것 같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시나 소설을 읽는 일이 그 중요성과는 별개로 나에겐 너무나 자의적이고 사적인 활동들이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가치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타인들의 수요를 고려해 업으로 삼기에는 그저 나만을 위한 영역이었다.

실제로 지금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는 별 상관없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다. 직장을 찾기까지 취향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직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로는 성장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탐구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던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졌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나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이다. 취향은 나를 세상과 구분시키는 하나의 닫힌 체계이다. 그것은 타인의 창작물과 같이 한 번 추상화된 세계나, 자연의 세계하고 연결되어있고 표출되기 전의 내면의 느낌을 작동시킨다. ‘내면’에 대한 실감, 자급자족의 의사소통 체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나에게 ‘사회생활’을 헤쳐 나가는 데 꼭 필요한 안정감을 준다. 사회생활에 몰입하다 자신을 잃지 않도록 지켜 준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누구에게나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권리가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취향에 대한 존중이나 긍정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아니고, 개인의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사회구성원이든 삶의 일부는 온전히 자기만의 것, 개별적인 경험으로 의미화 할 권리. 사회가 보장해야 할 일이 아니라 자기 마음 먹기에 달린 문제 같고, 절반은 그렇지만 나머지 절반은 최소한의 사회적 조건이 충족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것의 기준을 세우고 정교화하는 데에는 지속적인 시간이 들고 마음의 여유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며 살고 싶고, 그래서 기본소득을 지지한다.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해서 공통의 합의에 의한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것은 전혀 역설적이지 않다. 내가 원하는 나, 내가 원하는 가정, 내가 원하는 공동체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다수 ‘익명’의 시민들과 서로를 지지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아니면 내 부모가 원하는 가정, 국가가 원하는 공동체, 상사가 원하는 나에 맞춰 살아야만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한 요구들에 타협의 여지 없이 맞춰 살아야 한다면 삶은 ‘버티는 것’이 될 것이고, 그렇게 사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제자리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반면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더 발전시켜나가는 사회는 아마 다양성이 담보된 경합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회일 것이다. 나의 경우,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나에게, 그리고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퍼블리 <글로벌 기본소득 실험의 모든 것> 리포트 저자소개 글 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