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과 소멸

오늘 언유주얼 서스펙트 페스티벌에서 씨닷과 청년허브가 준비한 ‘생성과 소멸’ 세션에 가서 ‘그만 두려다가 다시 시작한 BIYN의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우리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이야기가 되었다는 게 늘 신기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지금 “기본소득 말하기 다시 기본소득 말하기”라는 책으로 나와 알라딘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목적지향적인 제3섹터의 조직이 맞이하는 마지막은 한계점인 동시에 최선의 성취가 있는 지점이기도 하고, 또 자원이 부족한 환경 속에서 쌓아 온 인프라는 자산인 동시에 부채이기도 하다는, 이 미묘한 딜레마에 대한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자리라 각별했는데, 멋진 제목 덕분인 것 같기도 하다. ‘지속가능성’이라든지 ‘생존’ 같은 단어가 아니라 ‘생성과 소멸’이라는 추상적 개념과 ‘선라이즈 앤 선셋’이라는 심상 아래에서 재무적 자원과 조직구조, 법 체계에 대한 이야기와 신뢰와 감정, 시시콜콜한 의례에 대한 이야기를 편안히 넘나들 수 있었다. 내게는 항상 이것들이 연동되어있는 영역들로 이해되는데, 이 시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이 흔치 않았어서 모처럼 나의 현실에 대해 온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온전하게 듣고 나눠 준 다른 패널, 진행자 분들과 청중 분들께 감사를.)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BIYN은 서로 다른 생성과 소멸의 시간들이 역동적으로 교차되는 장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치게 개념적이어서 사적인(또는 시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이 비전을, 나는 나의 동료들에게 공유한다기보다는 전염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의 행위자성을 부정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고(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BIYN에서 신뢰받고 있는, 조직 내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적합한 의례를, 말 걸기의 방식을 발명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설득보다 강력한 전염. 욕망의 언어와 구분이 안가는 운동의 언어. (뭐 제가 이런 생각을 골방 철학자처럼 하고 있으면 어딘가에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짠 하고 나타나기는 하는데요ㅋㅋ)

나는 세상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어떤 인과관계도 선형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내게 서사는 신비롭고 예술적인 것이라기보다 일종의 시스템적 사고다. 이야기는 우연과 운명으로 구성되고 어디로 흘러갈 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 내가 ‘활동’을 계속하는 개인적인 이유는 그것이 곧 세계에 대해 사유하는 엔진을 계속 돌려주는 일이어서인 것 같다.

[에세이]BIYN의 브랜딩이 내게 알려준 것

조만간 성북동으로 운좋게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폴레옹 제과점에서 성북 초등학교 방향으로 걸어올라가는 넓은 대로는 정말 멋지다. 인도가 없어서 뒤에서 엔진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바짝 벽에 붙는 동네에 살다보니 근래에 성북동에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인도였다.

그 길을 처음 제대로 걸어본 날은 디자인 스튜디오 오늘의 풍경 인아씨와 BIYN(구 ‘기청넷’)의 브랜딩을 위한 킥오프 미팅(겸 나들이)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초여름이었는지 늦여름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여간 여름의 어느 날, 인아씨와 커피 맛이 끝내주는 카페에 앉아 나는 기청넷의 새 아이덴티티에 무엇을 담고 싶은지 한참을 늘어놨다. 인아씨가 열심히 알겠다는 표정으로 내 말을 들어준 덕분에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겠는 순간까지 말을 많이 했다. 할 말 없이 말했다는 게 아니라 생각 이상의 말을 했다는 의미다.

“게으름뱅이를 위한 기본소득 같은 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스위스 기본소득 운동에서는 동전을 시각적으로 이용했는데, 우리도 현금이라는 상징을 그냥 당당하게 들이밀어도 좋겠구요. 힙스터들한테 잘 팔리고 싶다!!!” 기억나는 건 그닥 안 중요한 말 뿐이다. 우리가 굿즈를 만들자 쿵짝쿵짝 하며 동전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동전이 생각보다 꽤 값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회의를 마치고 빵을 먹으러 갔다. 빵을 먹고, 길상사에 갔는데 반바지를 입고 그냥 가면 안된다며 다리를 가릴 수 있는 보자기 치마 같은 것을 입구에서 나눠주고 있었다. 알고보니 그 날 높은 스님이 온다나. 절의 맞은 편 가게 벽면에서 효재님이 보살처럼 웃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남은 여름 동안도, 다가 온 가을에도 모두모두 너무 바빴고 겨울에야 간신히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기청넷의 개발자인 주연씨도 함께 참여하자 팀 다운 느낌이 났다. 셋이 모인 첫 워크숍 날, 인아씨가 준비해 온 BIYN의 아이덴티티를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깔끔한데 볼드하고 귀엽다는 것이었다. 다른 것보다 청년의 스테레오 타입처럼 톡톡 튀거나 발칙하지 않아서 좋았다. Y가 그냥 그 모양답게 톡 튀어나와있을 뿐. 그래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색이 들어갔으면 싶어 인아씨에게 검은색 말고도 옵션을 달라고 요청했다. BIYN의 디자이너는 똑 부러지게 고개를 저었다.

색이 필요하면 로고가 사용될 때 배경색을 바꿔. 로고는 무조건 검정이야. 색이 들어가면 너무 귀여워 보인단 말이야. 대신 배경색을 바꾸면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색을 쓸 수 있고, 얼마나 좋아?”

나도 귀여운 척은 싫지만 그래도 색을 좀 지정해주세요. 통일된 색이 있는게 굿즈나 그런 거 만들기도 낫지 않아?”

아니야. 기본소득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잖아. 얘는 그렇게 쓸 수 있게 나와있어. 이렇게 그림을 뒤에 러프하고 귀엽게 덧붙이거나, 배경 색을 바꾸거나 하면서.”

인아씨가 만들어 온 몇 가지 예시를 보여주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여름에 했던 중요한 말들이 유추되었다. 인아씨가 다 기억을 한 것인지 흡수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기본소득이 관점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특정한 문제에 대한 답처럼 소개하는 사람들이 자기 답으로 다른 답의 가능성을 지우는 것 같고, 그 보다는 현재의 여러가지 문제를 반영할 수 있는 관점으로서의 기본소득 운동이 발전되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이 의제가 보편적인 삶의 문제이자 사회 전환의 문제로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면 좋겠고, 누구나 자기 문제를 기본소득을 통해 해석할 수 있으면 좋겠고, 당연히 이곳의 기본소득 운동에서는 더 실질적인 문제를 가진 소수자의 목소리에 가중치가 실리면 좋겠고. 그런 말들을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내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납득하고 있는 동안 주연씨와 인아씨는 이미 새 웹사이트 와이어 프레임의 톤을 맞추고 있었다. “선이 4픽셀이라구요?” “네.” 너무 큰 텍스트와 너무 두꺼운 선들이 모여있으니 조금 흥이 나고 어이없게도 보기가 좋았다. “이게 브랜딩이야. 히워나.” 그래그래 알겠어. 그걸 보니까 큰 거리에서 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되어 누구나 그렇게 함께 말할 수 있는 그런 운동을 하면 되겠다. 그리고 이걸 띄우고 나면 비로소 나는 일단 딱 하나의 큰 목소리가 되어볼 수 있겠네. 누군가를 대표하느라 바짝 긴장한 느낌을 감추기 위해 길고 긴 실 같은 걸로 몸을 한참 감싼 주장이 아니라. (끝)


p.s.- 깨달음을 주는 사람. 이것 너무 한국의 중년 남성 지식인들의 판타지적 상황인 것 같은데, 역시 홍두깨(잡지 쿨 3호 참조)의 전적을 가진 인아씨다.